본문 바로가기

기획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⑦ _ 1980년대 이후 일본 반핵운동의 흐름

∥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⑦

1980년대 이후 일본 반핵운동의 흐름

 

 

지난 호에서는 핵기술 개발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일본 시민사회의 반핵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1980년대 이후의 흐름을 살펴볼 것이다.

 

 

스리마일섬 핵발전소 사고

 

 

1979328일 새벽 4시 미국 스리마일섬 핵발전소에서 중대 사고가 발생했다. 냉각수 급수계통 고장을 결정적인 원인으로 2호기에서 노심용융이 발생하여 방사능이 대기로 누출된 것이다. 상업운전을 시작한 지 겨우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일어난 사고였으며, 주변 지역에 긴급비상이 선포되어 주민들이 피난해야만 했다. 이 사고로 인해 세계는 핵발전소에서 중대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을 처음 인식하게 되었다.

 

일본 반핵운동 측에서도 이를 계기로 핵발전의 위험성을 더욱 강조했다. 이들은 각 지역의 핵발전소 운전정지와 건설취소를 주장했는데, 스리마일과 같은 가압경수로 핵반응로가 일본에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동일본 지역의 전력회사는 후쿠시마와 같은 비등경수로를 중심으로 핵발전소를 건설했고, 서일본 지역은 주로 가압경수로를 건설했던 터였다. 반핵운동 진영은 특히 가압경수로 오이 핵발전소 1호기의 기술적 약점을 주장하고, 운전정지를 요구했다. 이에 오이 1호기는 약 2개월간 안전성 점검 후 가동을 재개했는데, 일본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안전성과 보안규정 등에 이상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핵발전소가 사고 방지를 위한 안전대책을 취하고 있으며, 같은 가압경수로여도 미국과 메이커(제조 기업)가 다르므로 괜찮다는 논리를 펼쳤다. 일본 정부의 이와 같은 주장을 바탕으로 스리마일섬 핵발전소 사고도 일본의 상업용 핵발전소 확대를 멈출 수 없었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일본 사회에 일으킨 반향

 

 

1986426일에는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현재는 우크라이나) 4호기에서 핵반응로 폭주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핵반응로는 구소련이 개발한 흑연감속 경수비등냉각형 핵반응로(RBMK)였는데, 사고는 외부전원이 상실된 상황에 터빈발전기가 회전에너지의 관성으로 급수펌프에 전원을 공급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던 도중 핵반응로가 폭주하여 일어났다. 핵반응로에서 수소 폭발이 발생하여 핵반응로 덮개와 건물 지붕까지 완전히 파괴되었고, 흑연으로 인해 화재까지 발생했다. 사고 이후 10일간 방사성 기체(희가스)가 약 5천만 큐리(베크렐이 사용되기 전 단위, 1큐리는 3.7x10의 7승 베크렐), 요오드131이 3천~5천만 큐리가 방출되었다. 또한 발전소 주변 주민 약 13만 명이 이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피폭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다. 해당 사고는 국제 원자력 사고등급’(INES) 중 가장 심각한 7등급을 받았다. 7등급 사고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까지 전무후무했다.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유럽이 광범위하게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하지만 방사능은 8km 떨어진 일본에도 도달해 환경모니터링에서 방사성핵종이 검출되었다. 또한 방사능구름이 관측되었고, 방사능비가 잎채소와 차를 오염시켰다. 이에 더해 파스타 등 유럽에서 수입한 식품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일본 시민들은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해 강하게 인식하게 되었는데, 먹거리 안전 문제로 인해 특히 대도시 주부들의 반핵운동 참가가 크게 증가했다. 현재 탈핵운동을 하는 일본 여성들은 이때를 계기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경우도 많다.

 

해당 사고 이후 일본 반핵운동 진영은 반원전이 아닌 탈원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필자가 이전에 인터뷰했던 탈핵운동가에 따르면 일본의 대표적인 탈핵운동 단체인 원자력정보자료실(CNIC)을 설립한 다카기 진자부로가 유럽 탈핵운동 진영과의 교류를 통해 탈원전단어 사용을 제안했다고 한다. 핵발전을 반대하는 것만이 아닌 대안까지 생각하는 운동으로 발전한 시점이라 볼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탈핵운동 진영은 탈원전법제정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250만 명, 이듬해에는 330만 명의 서명을 받아 국회에 제출했지만 심의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1989년에는 원전이 필요 없는 사람들(原発いらない)’이라는 그룹이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이들은 탈핵을 정치적으로 의제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방송, 선전과 같은 선거활동을 통해 여론 조성에 힘을 쏟았다. 비록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주부들이 주체가 된 시민운동 세력인 자전거 시민이 출현하기도 했다. 이후 국민들의 핵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은 점차 사그라들었지만, 이 시기부터 운동의 참가 주체가 다양화되었고,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운동의 형태가 변화했다.

 

 

후쿠시마로 다시 불 지펴지기까지

 

 

199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핵발전체계를 위태롭게 할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고속증식로 몬주의 나트륨 누출 사고, 핵연료제조공장 JCO의 임계사고, 도쿄전력의 후쿠시마와 카시와자키카리와 핵발전소 구조물 균열 은폐 등의 사건이 있었으며, 2007년에는 츄에츠 지진이 발생해 카시와자키카리와 핵발전소 7기 중 가동하던 4기가 긴급정지했다. 하지만 이때마다 일시적으로 반대 운동이 발생할 뿐,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본 국민들은 핵발전의 위험성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핵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본 정부는 1차 석유 위기 이후부터 에너지 효율화를 추진해 왔지만, 국민들은 국가의 성장주의 구호 속에서 전력의 대량생산과 소비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일본 정부와 핵발전 추진 측이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 핵발전을 홍보한 것도 핵발전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형성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핵발전소는 도시에서 먼 변두리에 건설되어 그 위험이 숨겨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민들에게 핵발전은 자신의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러한 구조가 지속적으로 무관심을 생산했다.

 

한편 핵발전소 이외에도 사용후핵연료와 관련된 반대 운동도 전개되었다. 일본 본토 북단 아오모리현 롯카쇼무라의 핵연료재처리공장 건설, 사용후핵연료를 프랑스와 영국에 위탁 재처리하기 위한 핵연료 반출 등에 대해 반대 운동이 진행되었다. 재처리한 사용후핵연료를 상업로에서 가동하는 플루서멀도 지역을 중심으로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또한 방사성폐기물 문제도 탈핵운동의 주요한 의제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시민들 중에서도 탈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증가했다. 도쿄에서 열린 잘가라, 원전 집회의 경우 2011919일에는 약 6만 명이, 2012716일에는 17만 명이 모였다. 특히 2012년은 집회장과 가까운 하라주쿠역에 내리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 플랫폼을 다 빠져나가지 못했는데도 다음 전차가 오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정도였다.

 

△ 2012년 7월 16일에 열린 ‘잘가라, 원전 집회’ (사진 출처: 일본 ‘잘가라 원전 1000만인 액션’ 홈페이지)

 

 

핵발전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는 국민들의 비율도 현재까지 높게 유지되고 있다. 20213NHK 여론조사 중 핵발전소를 줄여야 한다전부 폐로해야 한다는 응답은 67%였다. 반면 핵발전소를 늘려야 한다는 응답은 3%에 불과했다. 핵발전을 홍보하기 위한 기관인 일본원자력문화재단의 2020원자력에 관한 여론조사에서도 핵발전이 필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23%였다.

 

현재 일본의 탈핵운동은 운동주체의 고령화, 시민들의 후쿠시마 망각과 무관심 등 다수의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사고 수습, 오염수 방출, 재처리 문제 등 보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 할 사안들도 많다. 일본의 탈핵운동은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본 탈핵운동의 강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 중 하나는 비교적 빠른 시기부터 핵발전 관련 지식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민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시민 과학을 육성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강점을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면서 핵발전 추진 진영에 대항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그들이 직면한 과제일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西尾漠. 2019. 反原発運動四十五年史. 緑風出版.

 

 

 

최종민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수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12월(95호)

 

 

 

탈핵신문은 독자의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운영합니다.

탈핵신문 구독과 후원 신청 https://nonukesnews.kr/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