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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⑥ _ 핵기술 개발 초기 일본의 반핵운동

∥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⑥

핵기술 개발 초기 일본의 반핵운동

 

 

이번 호에서는 핵기술 개발 초기 일본 시민사회의 반핵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본다. 일본에서는 탈핵신문 90(20217)에서 보았듯 1950년대 중반 핵무기에 반대하는 운동이 발생했다. 이후 각 지역에 핵시설 입지가 계획되면서 해당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반핵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일본의 1970년대까지 반핵운동의 흐름을 살펴볼 것이다.

 

 

출발은 핵시설 건설 반대 운동

 

 

1950년대 중후반 일본 정부는 상업용 핵발전소를 건설하기 전에 연구용 핵시설을 설치하려 했고, 수도권인 간토(関東) 지방에는 이바라키현의 농촌 마을인 도카이무라(東海村)에 연구용 핵시설이 밀집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오사카, 교토, 고베와 같은 서부 주요 도시를 포함하는 간사이(関西) 지방에도 연구용 핵반응로를 건설하여 교토대와 같은 지역 주요 대학들간의 공동연구를 계획했다. 건설이 예정된 지역은 교토의 우지시 고하타라는 곳이었는데, ()로 유명한 농촌 마을이었다.

 

고하타 지역에 연구용 핵반응로 건설 계획이 알려지자 주민들은 차가 팔리지 않을 것을 우려해 반대 운동을 펼쳤다. 주민들은 참치 어선 5 후쿠류마루1954년 미국의 수소폭탄 폭발 실험으로 피폭된 후 어류 불매 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 약 1500명의 서명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을 펼쳤지만, 핵기술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핵무기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주민들에게 핵기술의 위험성을 알려주며 운동을 지원했다.

 

고하타 지역 주민 대표는 국회 회의에도 참고인으로 초청되어 자신들이 왜 핵반응로 건설에 반대하는지 주장할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해당 핵반응로의 완벽한 안전성을 주장했고,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주민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주민들과 함께 정부의 반대편에 선 과학자는 완벽한 안전성은 없다며 일본 정부의 안전신화적인 발언에 맞섰다. 이후에도 반대 운동이 진행되자 고하타의 연구용 핵반응로 건설 계획은 취소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반대 운동이 일어나 건설하지 못하다가 1960년에 오사카 구마토리정에 연구용 원자로가 설치되었다.

 

고하타의 반대운동은 일본에서 처음 일어난 핵시설 건설 반대 운동이었지만, 아직 상업용 핵기술 개발은 반대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지역이 아닌 다른 곳에 핵반응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아시하마 핵발전소 건설 반대 운동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1960년부터 일본의 지역독점 전력회사들은 상업용 핵발전소 건설을 계획했다. 이 중 민간 전력회사인 주부전력은 미에현 아시하마의 구마노나다라는 연안에 상업용 핵발전소를 건설하려 했는데, 어장을 공유하는 어민들이 중심이 되어 건설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이들은 정부 조사단이 해양조사를 위해 방문했을 때 400척의 어업협동조합 배를 동원하여 조사를 저지했다. 반대 운동을 하는 주민들은 핵발전소가 실험단계의 기술이기 때문에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소외된 지역을 부지로 고른 점, 방사능의 위험성, 방사성폐기물에 대한 대책이 부재한 점 등을 근거로 들며 반대 논리를 구성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핵발전소가 지어지는 대가로 지역 개발을 제안했지만, 주민들은 바다와 어장의 소중함을 강조하며 이를 거부했다. 이처럼 해당 반대 운동은 핵발전소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당 운동도 자신들의 지역에 핵발전소가 건설되는 것에 반대하며, 다른 지역에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주민들의 반대 운동으로 인해 1967년 미에현 지사가 핵발전소 건설 종지부 선언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주부전력은 용지를 매각하지 않고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이에 주민들은 긴 시간 반대 운동을 진행했고, 2000년에 주부전력이 최종적으로 핵발전소 건설을 백지화했다. 핵발전소 건설은 막을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의 투쟁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 간에는 분열이 발생하여 아픔으로 남았다. 한국도 많은 경우 비슷하지만, 일본도 마을에 핵발전소 건설이 추진되면 이를 둘러싸고 주민들 간 갈등이 발생하는 일이 많았다. 핵발전소 건설을 저지했더라도 입지가 계획되었던 마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피해가 있었다.

 

이처럼 1960년대까지 일본 각 지역에서 핵시설 건설에 반대한 운동은 핵발전소의 위험성은 인식했으나, 핵발전소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지역에 건설되지 않으면 괜찮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각 지역에 핵발전소 건설이 본격적으로 계획되고 시작되면서 핵발전 반대 운동도 발생했고, 주민들의 인식도 변하게 되었다.

 

 

핵발전 반대는 모두의 일

 

 

고하타의 반대 운동 사례에서도 보았듯 일본에서는 핵발전의 위험성을 깨닫고 핵기술 개발에 의문을 가지는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주민들의 반대 운동을 지식을 통해 지원했고, 197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을 펼쳤다. ‘원자력자료정보실(CNIC)’ 설립의 중심적인 인물인 핵화학자 다카기 진자부로도 일본의 반핵운동을 이끈 과학자 중 한 명이다. CNIC는 핵발전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하여 비민주적으로 추진되는 정부 주도 과학에 맞서는 시민 과학양성도 주요한 목표로 해왔다.

 

다시 주민들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주민들은 핵발전의 위험성을 깨닫고 단지 자신의 지역에 건설되는 것만 반대하는 것이 아닌 핵발전에 반대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지역적으로 산발되어 있는 운동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72129원전반대운동 전국활동자회의가 열렸고, 197211월에는 CNIC의 전신인 원전·재처리공장반대운동 정보·연락센터가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반핵운동의 전국화가 전개되었다.

 

일본에서는 1970년대 초반부터 가동을 시작하는 핵발전소가 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고장이 자주 발생했다. 따라서 설비이용률과 시설가동률은 저하되었고, 이를 토대로 반핵운동 측은 핵발전소의 위험성과 비경제성을 더욱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반핵운동 측은 방사성물질의 위험성, 온배수 문제, 정책 과정의 비민주성과 안전심사의 문제점 등 다양한 근거를 들어 운동을 전개했다.

 

주민들은 핵발전소 설치허가 취소 소송 등 법적인 대응도 시작했다. 과학자들이 위험성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변호사들이 법적인 자문과 전반적인 소송 진행을 지원했다. 하지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전 일본의 모든 반대 소송은 건설 추진 주체인 국가와 전력회사가 승소했다. 스리마일섬 핵발전소 사고,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재판소는 국가가 주장하는 안전성을 지지했다.

 

△ 1978년 4월 26일 요미우리신문에 실린 이카타 핵발전소 설치허가 취소 소송 패소 후의 사진. 반핵운동 측은 ‘신산입가경’이라고 적은 펼침막을 내걸었다. (자료: http://www.rri.kyoto-u.ac.jp/NSRG/seminar/No111/Kawano20150227.pdf)

 

 

하지만 반핵운동 측은 포기하지 않고 각 지역에서 소송을 일으켰고, 핵발전소의 위험성 연구도 지속했다. 이들은 핵발전소 주변 식물의 돌연변이를 조사하고, 방사성물질을 측정했으며, 해저 침적물을 채취해 코발트와 망간 검출을 확인하는 등 핵발전 과정에서 자연계에 배출되는 방사성물질의 유해성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핵운동의 기세가 강력해지자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는 새로운 지역에 핵발전소를 건설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한 것이 교부금이었는데, 1974년 전원삼법 교부금제도가 시행되면서 입지 지역은 건설의 대가로 교부금을 받게 되었다. 이후 핵발전소는 새로운 지역이 아닌 이미 입지한 지역에 추가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한 부지에 다수 호기의 핵반응로가 밀집하는 구조를 갖게 되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 6기의 핵반응로가 밀집해 있었던 것도 그 예이다.

 

1980년대부터는 일본의 반핵운동에 변화가 있었다. ‘반핵운동이 탈핵운동이 된 것도 이 시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西尾漠. 2017. 日本の原子力時代史. 東京: 七つ森書館.

 

 

글쓴이: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수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11월(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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