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재해로 인한 핵발전소 사건·사고
역대급 태풍에
고리·월성 핵발전소가 멈췄다
핵발전소와 자연재해의 관계를 생각하면 흔히 ‘지진’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자연재해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최근 기후위기가 점차 심해짐에 따라 폭염, 혹한,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다양해지고 있다. 또한, 이에 따라 산불이나, 전염병 창궐, 생태계 교란 같은 일들도 점점 잦아지고 있다.
그간 지진을 제외한 자연재해로 핵발전소가 영향을 받은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이 운영하는 ‘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에는 1978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핵발전소 사건·사고 760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지진을 제외한 자연재해로 인한 것은 22건이다. 위 표를 보면 대부분 태풍으로 인한 것이다. 태풍 ‘베라’, ‘셀마’, ‘매미’ 등 지금도 역대급으로 언급되는 태풍으로 인해 핵발전소가 멈췄다.
*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전안전운영정보시스템’ 내용정리 및 하이선 태풍으로 인한 사건추가 (제작=탈핵신문)
발전소가 멈추게 된 원인도 다양하다. 대부분 송전선로에 문제가 생기면서 원자로가 정지되었지만, 1986년 9월 고리 1호기와 1987년 고리 3·4호기는 염분이 송전 시설에 축적되면서 송전선로에 누전이 발생하여 결국 발전기와 원자로가 멈췄다. 1987년 고리 2호기와 1991년 고리 4호기는 취수구에 오물이 대거 모이면서 취수가 되지 않아 발전소를 멈췄다. 홍수에 떠내려온 각종 오물이 취수구를 막아 냉각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연재해는 아니지만, 울진에서는 종종 새우 떼나 해파리 떼가 냉각수 취수구를 막아 발전소를 멈추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2003년 태풍 매미가 왔을 때는 터빈 건물 중 일부가 파손되어 날아다니다가 주변압기와 충돌하여 이 때문에 원자로를 정지한 일이 있기도 했다.
태풍이 오지는 않았지만, 2014년에는 냉각수를 공급하는 취수 펌프실이 침수되어 고리 2호기가 멈추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펌프실로 들어가는 케이블 도관을 통해 빗물이 들어왔던 것이 원인이었다. 고리 2호기 건설 당시 설계도면에는 밀봉할 것을 명시했는데, 30여 년간 밀봉되지 않고 있다가, 시간당 134mm의 집중호우가 내리자 빗물이 유입된 것이다.
올해 9월, 남부지방을 강타한 태풍 ‘마이삭’은 고리 1~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등 6기의 핵발전소가 소외전원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국내사상 최대의 핵발전소 사건·사고에 해당한다. 마이삭으로 인해 고리 3·4호기와 신고리 1·2호기 등 4기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 정지되었다. 폐로 절차를 진행 중인 고리 1호기와 계획예방정비 중이었던 고리 2호기는 가동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송전선로에 문제가 생기면서 외부전원이 끊기고 비상디젤발전기가 가동되었다. 고리 1호기와 2호기는 정지 중이었으나, 외부전원을 완전상실한다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전기공급에 문제가 생겨 방사성물질이 대량 누출될 사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상적 가동 중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외전원상실’
핵발전소에는 다양한 안전장치가 있다. 핵연료를 안정적으로 냉각시키지 못하면, 중대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센서가 설치되어 있어 이상 신호가 들어오면 안전을 위해 일단 원자로를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무언가 문제가 생겨 핵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는 것은 안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번 태풍 ‘마이삭’으로 인해 핵발전소가 멈추자, 한수원은 ‘안전장치가 작동한 것일 뿐 방사능 누출 등 안전상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표면상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비상디젤발전기는 대표적인 안전장치로 발전소의 외부전원이 끊어졌을 때, 내부에서 전원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다. 후쿠시마 사고의 경우, 이 비상 전원이 공급되지 못하면서 대규모 폭발사고까지 연결되었다. 국내에서는 2012년 2월, 고리 1호기에서 외부전원과 비상디젤발전기 모두가 작동하지 않으면서 12분 동안이나 외부전원이 끊어지는 ‘소외전원상실’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짧은 시간에 원자로 냉각수는 21.4도나 증가했다. 계획예방정비를 위해 원자로가 멈춰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냉각펌프 순환이 멈추면 온도 상승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이런 ‘소외전원상실’이다. 태풍으로 여러 겹의 안전장치가 무너졌고, 이 때문에 ‘소외전원상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기후위기 심화에 따라 이런 일이 더 자주 일어날 것이 예상돼 우려되는 상황이다.
태풍에 취약한 장소에 몰려 있는 고리 핵발전소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일어난 태풍 피해가 대부분 고리 핵발전소를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고리 핵발전소는 남쪽 바다를 향해 있다. 태풍 진행 방향의 바람이 가장 강력하고 우리나라 태풍은 대부분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왜 고리 핵발전소가 태풍에 취약한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고리에는 이미 폐쇄된 고리 1호기를 제외하더라도 고리 2~4호기와 신고리 1~4호기가 운영 중이다. 조만간 신고리 5~6호기도 가동될 예정이다. 무려 9기의 핵발전소가 동시에 가동되는 상황은 자연재해 발생 시 전력공급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다행히 이번 태풍 ‘마이삭’이 물러간 이후엔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전력수요가 많지 않다. 여름철 전력 피크를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태풍이 항상 이럴 때만 오라는 법은 없다. 가동을 멈춘 핵발전소는 바로 재가동할 수 없다. 안전점검과 문제점 보완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벌써 태풍이 지나간 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리·신고리 핵발전소가 재가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후위기가 재난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 태풍에 취약한 장소에 많은 용량의 핵발전소가 몰려 있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가중시킨다.
∥ 자연재해로 인한 해외 사건·사고 사례
물에 잠긴 미국 포트 칼혼 핵발전소
우리나라의 핵발전소는 모두 바닷가에 있지만, 내륙에 자리한 핵발전소는 냉각수 공급 문제 때문에 강가에 있는 경우가 많다. 홍수로 인한 강의 범람은 태풍만큼이나 핵발전소에 위협적이다. 미국의 과학자 모임인 ‘참여 과학자 모임’의 데이비드 록바움은 미국 내 20여 개 핵발전소의 홍수 피해에 대해 지적했다. 대표적인 것이 2011년 6월, 네브래스카주 포트 칼혼 핵발전소 침수 사건이다.
△ 2011년 6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강이 범람해 포트 칼혼 핵발전소가 물에 잠겼다. (사진 출처: 미 육군 공병대)
홍수로 화재·냉각펌프 중단·제방 붕괴
결국 2016년 핵발전소 폐쇄
미주리강 인근에 있는 포트 칼혼 핵발전소는 500년 주기 홍수를 견딜 수 있도록 지어졌지만, 2010년 미국 핵규제위원회는 외부 홍수에 대비한 적절한 대비책이 없다며 보강을 지시했다. 핵규제위원회는 포트 칼혼 핵발전소가 1014피트로 지정된 홍수 기준을 지키지 못했고, 1010피트까지 물이 찰 경우 원자로 노심이 손상될 확률이 100%라고 지적했다. 이듬해인 2011년 6월 초, 미주리강에 대규모 홍수가 발생했다.
당시 포트 칼혼 핵발전소는 핵연료 교환을 위해 발전을 멈춘 상황이었다. 포트 칼혼 핵발전소는 밖으로는 홍수가 나고 핵발전소 내부적으로는 화재가 발생하여 사용후핵연료 냉각 펌프가 1시간 반이나 멈추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수위가 계속 높아지는 상황에서 6월 26일에는 발전소 주변에 있던 제방이 붕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핵발전소 격납건물과 보조 건물이 물에 둘러싸이는 일이 발생했다. 비상 발전기를 동원해 냉각 펌프에 전원을 공급하면서 위험을 겨우 넘겼다.
이후 포트 칼혼 핵발전소는 대대적인 점검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건물 안전성에 대한 새로운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결국 2016년 폐쇄되었다.
이헌석 편집위원(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
탈핵신문 2020년 9월(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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