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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기사, 핵폐기물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의 문제점과 해법

욕심의 발원지를 특정하긴 힘들지만, 월성핵발전소의 맥스터(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를 적기에 건설하겠다는 욕심이 모든 것을 망쳐놓았다. 정부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정책 재검토 준비단이 출범할 때(2018.5.11.) 맥스터의 적기 건설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 욕심을 움켜쥐고 만 2년이 흐른 지금, 공론화는 철근이 뒤엉킨 타래가 됐다. 쾌도난마의 수가 보이지 않는다.


△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19일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푁에서 '탈핵'을 약속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문재인 정부가 다시 실시하는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의 핵심 과제가 무엇일까?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을 둘러싼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는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며 2024년까지 전기에너지의 48.5%를 핵발전으로 공급하겠다는 정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책이 바뀌어 2030년까지 핵발전소의 전기 공급량은 23.9%(설비기준 11.7%)로 줄어들게 됐다. 이렇듯 장기 에너지 정책은 10년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하물며 10만 년 이상 안전한 관리가 필요하고, 핀란드 방식인 지하 500미터(빌딩 100층 높이) 심지층 처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선진국 기술 수준의 70%에 불과한 대한민국에서 장기적인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수립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크고 작은 공론화를 수없이 반복하며 그때그때 사회적 여건에 맞는 장기 관리정책을 계속 갱신해갈 것이다. 100년 뒤에 우리나라가 핵발전소 가동을 다 멈추더라도, 100년 후에 태어날 미래세대는 남겨진사용후핵연료 문제를 두고 공론화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시민사회가 철수한 이유

 

그래서 문재인 정부의 과제는 핵발전소의 건식저장시설 관리정책을 잘 마련하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이 포화 상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맥스터 건설의 무기한중단을 선포하고 공론화에 착수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맥스터 건설에 무게를 뒀다. 20206~7월경에 공론화를 마치는 계획이 여기서 비롯했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정책 재검토 준비단발족에 함께하면서 공론화의 중심축을 형성했던 시민사회가 결국 공론화에서 철수했다.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의 주요 기반인 시민사회가 공론화를 등진 것이다. 정부는 공론화를 다시 하면서 시민사회의 참여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시민사회는 핵발전 중심의 에너지 정책을 강력하게 펼쳐온 산업통상자원부가 주관하는 공론화를 근본적으로 불신한다. 그럼에도 공론화 초기에 참가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웠던 탈핵에너지전환 정책이 잘 되길 바랐고, 무엇보다 맥스터를 공론화 의제에 포함하고 공사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론화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맥스터 적기 건설을 노골화하는 과정을 보면서 시민사회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재검토위원회에서의 이해당사자 배제, 지역공론화범위 축소 등 무수한 논란들은 맥스터 적기 건설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줄기에 불과하다.


사용후핵연료는 폐기물인가, 아닌가

 

이번 공론화가 꼭 해결해야 할 사용후핵연료 건식저장시설을 둘러싼 여러 문제란 다음과 같다. 첫째, 핵발전소 내에 보관된 사용후핵연료는 고준위방사성 폐기물인가, 아닌가. 둘째, 앞으로 사용후핵연료를 보관할 건식저장시설은 폐기물 보관 시설인가, 아닌가. 셋째, 건식저장시설은 향후 원자력환경공단이 관리해야 하는가, 한수원이 관리해야 하는가. 넷째, 건식저장시설에 보관하는 사용후핵연료의 양은 어느 정도가 적합한가. 다섯째, 건식저장시설의 운영 기간은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하는가 등이다.


건식저장시설을 둘러싼 이러한 관리정책 마련이 중요한 이유는, 영구처분장 건설 등 사용후핵연료 장기 관리정책을 현실화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핵발전소 주민들의 고통 가중이 빤하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 위험 떠안고 사는 주민들

 

고리 1호기를 기준으로 핵발전소 주민들은 40년 넘게 사용후핵연료의 위험을 떠안고 살아왔다. 핵산업계의 다급한 목소리에만 귀 기울여 무턱대고 건식저장시설을 서둘러 건설하면 주민들의 고통은 탈출구 없는 지옥행이다. 또한, 핵산업계는 가장 큰 골칫거리인 사용후핵연료를 손쉽게 처리하면서 핵발전 진흥의 보검을 손에 쥐게 된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이러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공론화 과제였다.


그래서 월성핵발전소 맥스터의 적기 건설 담론은 매우 위험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맥스터 건설 무기한 중단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지난 2년간 철근으로 뒤엉킨 타래를 쾌도난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맥스터 건설을 무기한 중단하면 월성핵발전소 가동도 중단된다. 월성 2·3·4호기가 2022년 기준으로 수명종료까지 경주지역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은 지방세, 법정지원금 등을 모두 합해서 약 1000억 원이다(가동률 80% 기준). 정부가 최대 1000억 원까지 공론화 지연 보상대책을 마련하면 경주시의 맥스터 조기 건설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 참고로 월성 2·3·4호기의 수명은 각각 2026, 27, 29년이다.

 

월성 2·3·4호기 가동 중단

사용후핵연료 둘러싼 진지한 공론 촉발할 것

 

맥스터 건설의 무기한 중단이 발표되면 시민사회도 공론화에 다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맥스터 건설의 무기한 중단과 뒤이은 월성 2·3·4호기 가동 중단은 우리 사회에 사용후핵연료를 둘러싼 진지한 공론을 촉발할 것이다. 무엇보다 핵발전소 지역 주민들은 건식저장시설의 투명한 관리기준을 마련하는 일에 착수할 것이다. 맥스터 증설을 비롯한 각 핵발전소의 건식저장시설 건설 여부는 그다음의 문제다.


공론이 실종된 곳에서 작은 공론이라도 일으켜보자고 경주지역 시민사회는 맥스터 찬반 주민투표 운동을 펼치고 있으나, 정부와 경주시는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경주시민 3000명 설문조사를 일방적으로 실시하고, 100여 명을 모아서 형식적인 숙의 과정을 거쳐 한바탕 맥스터 건설 잔치를 벌이고 나면 우리 사회에 남는 게 과연 무엇일까?


문재인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분명 탈핵에너지전환 정책의 큰 틀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정책의 어느 지점에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서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탈핵에너지전환 정책의 좌표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 정부의 공론화도 핵산업계의 입김에 따라 굴러가던 관성으로 계속 굴러가고 있다. 애석하다. 4·15 총선에서 180석의 힘을 정부 여당에 실어줬지만, 탈핵에너지전환 정책에 대해서 용기 있는 목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탈핵신문 2020년 5월(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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