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기후에너지 활동가
지금은 정부의 정책 용어가 된 에너지 전환(energiewende)의 시초는 독일로 잘 알려졌다. 독일에서는 에너지 전환의 큰 기둥은 기후변화 대응과 탈핵이었다. 여기에 기둥 하나를 더한다면 ‘에너지 안보’를 들 수 있다.
기후정의 운동과 탈핵 운동 사이엔 묘한 긴장이 존재한다. 아마 최근 핵산업계, 야당과 일부 언론이 틈만 나면 ‘탈원전 반대’를 외쳐대니 더 그런지도 모른다. 특히, 미세먼지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핵발전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주장이 반복되면서 그렇다.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은 수세적 태도로 얼어붙었다.
이런 긴장 탓일까. 아니면, 위기는 심화되는데 운동의 대중화는 어느 쪽이든 지지부진한 탓일까. 간혹, 탈핵과 기후위기 대응 중 ‘우선순위’를 피력하는 대화가 펼쳐질 때가 있다. 한 번은 탈핵 요구가 힘을 받기 위해 석탄발전소 폐쇄 운동을 적당히 자제(?)하라는 식의 코멘트를 듣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도 있다. 파장과 영향 측면에서 기후위기의 대응이 더 절박하다는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이 줄기는커녕 계속 증가하는 가운데, 과학계는 이대로 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찜통지구’ 상태로 접어들고 대멸종이 불가피하다고 경고한다. 아울러 지구 한계의 상한선인 1.5℃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불과 10년밖에 안 남았고, 미래 세대는 더욱 가혹한 조건에 강제될 수 있다. 스웨덴의 16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로 상징되는 청소년 주도의 ‘기후 파업’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이유다.
당연히 탈핵과 기후위기 대응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근본 원인과 해법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화석연료와 우라늄은 연료는 다르지만, 핵발전과 기후 위기는 무한한 경제성장이란 신화, 불평등과 착취의 구조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녹색성장’을 국가 비전으로 내세운 이명박 정부 기간 핵발전을 적극 진흥했으면서도 동시에 온실가스 배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는 사실이 이를 설명한다. 핵 재난과 기후 붕괴는 한 번 ‘티핑 포인트(임계치)’를 넘어서면 불가역적 영향과 멸종을 자초하지만, 정부와 주류 언론이 위기를 외면하는 양상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1일, 760만 명이 참여한 세계적 기후 파업을 맞아 한국 서울에서도 5천 명이 ‘기후위기 비상행동’ 시위를 벌였다. 두 달 남짓 기후위기에 공감하는 시민사회가 연대해 최대 규모의 기후 시위를 조직했다.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내건 요구는 크게 정부가 기후 비상선언을 선포하고, 온실가스 배출 제로 목표를 수립하며, 기후위기를 대응할 범국가기구를 설립하라는 것이다. 요구 중 세부 내용으로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 기술공학적 해결책의 도입에 신중하고, 핵발전의 이용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포함돼 있다.
오늘날 위기를 불러온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제에 맞서지 않으면, 온실가스 감축과 탈핵은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커지는 ‘풍선 효과’에 갇힐 수밖에 없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기에, 선을 제대로 긋고 새로운 행동을 조직할 때이다.
탈핵신문 2019년 10월호(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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