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현(경북대학교 행정학부 교수)
현재 탈핵 진영과 찬핵 진영이 신고리5·6호기의 건설 중단을 놓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처음으로 정권을 장악한 탈핵 진영은 정부 조직을 바탕으로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공식적인 국가 탈핵 전망과 비전을 차근차근 제시해나가고 있다. 반면에 청와대를 빼앗긴 찬핵 진영은 국회, 언론 및 핵발전 유관기관들을 동원해서 거짓 정보와 편향된 기사를 쏟아내며 전면전을 펼치고 있다. 양측 모두 이번 전쟁에서 패한다면 앞으로의 길고 긴 싸움에서 계속 밀릴 수 있다며, 한 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사실 탈핵 진영은 이미 세력 싸움에서 한 번 밀렸다고 볼 수 있다. 신고리5·6호기의 건설 중단은 대통령의 공약이었기 때문에 논의할 필요도 없이 취임 즉시 실행되었어야하는 사안이었다. 그렇지만 핵발전 산업계의 반발과 지역 주민들의 요청으로 인해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발 물러서면서 지금은 일반 국민들에게 결정권을 떠넘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면 무책임한 대통령으로도 보인다.
이처럼 약속을 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제안한 ‘공론화’는 시민사회 입장에서 거부할 수도 없는 카드였다. 필자뿐만 아니라 탈핵에 대한 공론화를 끊임없이 주장해왔던 환경단체들이 시민들의 결정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채 공약을 이행하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에서 신고리5·6호기의 공론화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건설 중단의 결정권을 시민사회와 핵발전 산업계에 떠넘길 수 있는 일종의 묘수였을 것이다.
이때 탈핵 진영에서는 핵에너지에 대한 국민적 반발과 저항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공론화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수용했던 측면도 있다. 실제로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는 건설 중단을 요구하는 의견이 한참 앞서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에 발표된 자료를 보면 이미 자금이 투입된 건설은 그냥 진행하자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지지율이 역전되는 현상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금은 신고리5·6호기 공론화의 미래가 밝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필자는 이번 공론화와 관련된 미래의 불안이, 과거 참혹했던 실패의 그림자가 보인다는 측면에서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업보를 지니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시절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담당했을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고, 지난 대선에서도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친노세력을 결집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핵발전 역사에 어떤 그늘을 드리웠을까?
핵폐기물은 한국 사회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골칫거리였다. 늘 문제를 일으킬 뿐이지 별다른 해법을 찾지 못했던 집 안에 갇혀 있는 코끼리 같은 갈등의 소재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를 2004년에 중·저준위와 고준위로 분리해서 사안을 작게 축소한 다음에, 3000억원의 특별지원금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마련하였다. 결과적으로 2005년 11월에 경주시로 폐기물처리장을 결정하는 작업이 참여정부 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지금과 유사한 고민 속에서 비슷한 해법을 찾아냈었다. 한마디로 골칫거리를 지역 주민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즉, 국민적 반발이 심한 사안이니 원하는 주민들이 있으면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유치를 원하는 지자체의 신청을 받아서 주민투표를 실시해 찬성 비율이 높은 지역으로 중·저준위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결정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물론 이 역시도 시민사회 진영에서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책 집행방식에 문제를 제기해왔던 환경단체의 입장에서 정책결정을 지역 주민들의 손에 맡기겠다는 제안은 흠잡기 어려운 묘수였다. 물론 당시 주민투표에 몇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었지만, 나름대로 절차적 합리성에 기반한 정책결정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에도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면서 공론화를 통한 국민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절차적 합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즉 현 정부는 가치라는 ‘실질적 합리성’을 포기한 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선택의 ‘절차적 합리성’만을 채택한 것이다. 한 마디로 지금의 공론화는 문재인 대통령이라는 정책 결정자가 대한민국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지 않은 채,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과정만을 합리적으로 진행하겠다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게다가 현 정부는 내년부터 사용후핵연료라는 고준위 폐기물과 관련해서도 공론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때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현 정부가 추구하는 가치를 포기한 채 절차만 합리적으로 진행할 지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정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정책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인데, 지금의 대통령은 가치를 포기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회피해버린 가치를 시민들이 공론화 과정에서 지켜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탈핵신문 2017년 9월18일
'오피니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이 다시 빠진 핵발전의 늪, 선거제도 때문! (0) | 2017.11.08 |
---|---|
公론화가 空론화 되지 않기를… (0) | 2017.09.28 |
천하에 쓸데없는 전문가들 (0) | 2017.09.08 |
탈핵, 그리고 고준위 핵폐기물 (0) | 2017.09.08 |
현장 활동가의 유럽현장 탐방기② (0) | 2017.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