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종(고창군농민회 회장)
지난 8월 30일(수)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를 놓고 고창과 영광, 전남·북 반핵(탈핵) 활동가들의 토론회가 열렸다. 고준위 핵폐기물은 핵발전소에서 쓰고 남은 사용 후 핵연료를 말한다.
2003년 고창에 핵폐기장을 건설하려던 정부 계획이 백지화된 지 14년,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핵발전 관련한 가장 거창한 토론회에 참여한 셈이다. 고창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기까지 3~4년간 고창 사람들은 참으로 빡세게 싸웠고, 그 앞장에 농민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간 이 문제와 담을 쌓고 살아왔다. 어쩌면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서 “공론화를 통해 사용 후 핵연료 정책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 하반기에는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사실 박근혜 정부 시절 공론화의 탈을 쓰고 일방적으로 고안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을 폐기하고 전면 재수립해야 한다는 탈핵 진영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이다. 문재인 정부가 ‘신규 원전 건설계획 백지화’와 ‘노후원전 수명연장 금지’ 등을 주 내용으로 하는 탈원전 로드맵을 밝힌 마당에, 이제는 정부가 이 문제를 차질 없이 잘 이행하게끔 돕기만 하면 될 문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탈원전’이라는 의제는 향후 수십년간에 걸친 사회적 공론화 과정과 탈핵진영과 핵산업계 등 이해 관계자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동반하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다. 반면 ‘고준위 핵폐기물(사용 후 핵연료)’ 문제는 이미 1만톤이 넘게 적체되어 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양산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임시)저장능력 자체가 포화상태에 이르고 있다는 사안의 시급성이 존재한다.
(사용 후)핵연료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물건인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통해 널리 입증됐다. 또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사용 후 핵연료에 관한 완벽한 관리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핵산업계는 발전소 부지 내 별도의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고 건설을 다그치고 있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이에 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고 강변한다.
말짱 거짓말이다. 위험천만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핵발전소 운영을 위한 핵산업계의 도발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탈핵(탈원전)’이라는 의제와 사용 후 핵연료 문제는 한덩어리로 취급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핵발전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 문제를 해결하고 이와 관련한 국민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사용 후 핵연료 임시저장시설’ 등 핵발전과 관련한 그 어떠한 추가적 건설과 수명 연장을 위한 시도 역시 전면 중단돼야 마땅하다. 이는 사안의 시급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똥 마려운데 어떻게 하느냐’는 투정질은 ‘화장실 대책도 없이 웬 똥타령이냐’는 상식적인 지탄에 직면해야 마땅하다.
탈핵은 국민적 의제로, 사용 후 핵연료 문제는 발전소가 소재한 해당 지역의 문제 혹은 부지 선정의 문제로 분리되는 순간 이로부터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발아하게 될 것이며, 이를 무시하고 무엇이든 강행하려 한다면 필연코 저항과 투쟁을 불러올 것이다. 이는 애시 당초 의도한 ‘공론화’와는 동떨어진 결과가 된다. 문재인 정부가 진정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풀고자 한다면 박근혜 정부 시절 일방적으로 고안된 고준위 핵폐기물 관련 법안과 모든 조치들을 전면 백지화한 조건에서, 전반적인 탈핵 로드맵과 동일한 무게로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를 의제화해야 한다.
고준위 핵폐기물 문제야말로 핵발전을 고안해낸 인류가 직면한 가장 뜨거운 감자가 아닌가.
※ 이 글은 지난 9월 3일(일) 한국농정신문 농민칼럼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한국농정신문의 양해를 구해 전재합니다.
탈핵신문 2017년 9월호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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