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화(탈핵양산시민행동 공동대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경남 양산이다. 이곳은 고리 핵단지로부터 30km 안에 대부분 지역이 포함되는 곳이기도 하다. 고리가 있는 기장군은 1995년 양산에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즉, 기장이 양산과는 그만큼 가깝다는 것은 예전의 행정구역만 봐도 알 수 있다. 핵발전소 인근이지만 광역지자체가 아니다보니 언론에는 직접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양산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내재된 불안을 느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고리5·6호기 공론화 논란은 참으로 황당하다. 우리는 대통령을 믿었다. 촛불에 의해 탄생한 대통령이기에 국민의 안전을 누구보다 챙길 것이라 기대했다. 특히, 대통령 후보시절인 지난 4월에 탈핵 진영과의 정책협약에서 언급한 신고리5·6호기 백지화는 졸속 승인을 자행한 지난 정권의 과오와 적폐를 청산하는 강한 의지의 한 축으로 보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은 정책협약서에서 오히려 건설 중인 신고리4호기, 신한울1·2호기의 건설을 잠정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를 통해 운영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여 월성핵발전소 1호기 수명연장 재판 항소를 취하하고 월성1호기를 즉각 폐쇄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많은 약속들이 후퇴를 하거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난주에 발표된 신고리5·6호기공론화 시민참여단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보인 남녀 성비율이나 연령 비율, 지역별 분포도를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명의 시민 참여단 연령비율을 보면 60년을 가동할 핵발전소의 운명을 앞으로 살아갈 젊은 세대보다 50대, 60대가 절반 가까이 참여하여 결정하는 형국이다. 지금 50살, 60살이면 60년 뒤에는 100살이 넘게 된다. 그 때 살아있지도 않을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의 미래 환경과 생존을 결정한다는 것은, ‘공론화’라는 함정 속에 같은 잣대를 대는 것이고, 과연 그것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핵폐기물이나 만일의 사고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아가야 할 다음 세대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매정한 결정이다.
공론화 시민참여단 지역 분포에서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서울이나 경기도는, 고리핵발전소 주변 지역 주민들과 핵발전소사고 위험에 대해 느끼는 온도는 다르다고 봐야 한다. 500명의 시민참여단 중 신고리5·6호기와 인접해 있는 부산, 울산, 경남의 주민은 겨우 60명(13.4%)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특히, 신고리5·6호기와 제일 가까운 울산을 고작 7명(1.4%)만 시민참여단에 구성해 놓았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탈핵을 공론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울·경 주변에 들어서는 신고리5·6호기에 대한 공론화이다. 신고리5·6호기로부터 200km 떨어진 수도권의 주민들이 과연 얼마나 중립적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정 지역에 들어서는 핵발전소를 두고 전 국민이 공론화하는 것 자체가 공정하지 못한 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신고리5·6호기는 2016년 6월 박근혜정부 때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 단 9명이 졸속으로 승인을 결정하였다. 그때 당시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 구성부터가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위원 중 5명은 대통령 권한으로 지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2명은 야당 몫, 2명은 여당(전 새누리당) 몫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진 안전성 평가 부실, 다수호기 위험성 평가 누락, 인구밀집지역 위치제한 규정 위반 등 온갖 반칙이 저질러진 신고리5·6호기 승인 허가가 난 것은 누가 봐도 거대한 골리앗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권이 바뀌었다. 지난 6월 19일 대통령이 고리1호기 퇴역식에서 언급했듯 ‘새 정부 원전 정책의 주인은 국민’이다. 작년 9월 5.8 경주지진을 겪으며 국민안전처가 마비된 상황에서 공포를 연대한 국민이, 1년 동안 600회가 넘는 여진을 경험한 국민이, 활성단층판이 60여 개나 존재하는 주변에 들어설 신고리5·6호기 핵발전소를 누가 원하겠는가?
고리1호기 폐쇄가 지난 정권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의 결과로 얻어낸 결정이라면, 신고리5·6호기 백지화는 5200만 촛불의 명령으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출범한 새 정권이 탈핵원년의 해를 만들기 위해 열어야 하는 첫 포문과도 같다. 대통령의 약속에서 한 발 물러난 신고리5·6호기 공론화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겠지만, 시작부터 연령대나 지역분포 비율에서 미래에 생태부채를 떠안아야 할 세대에 대한 배려나 핵발전소를 운명처럼 지고 살아가야 할 지역에 대한 배려 없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공론화… 지도에서는 잘 표시도 되지 않은 지역에 살지만, 사고 시 도시 전역이 피해 반경에 속하는 양산 주민으로서 公론화의 空허한 진행과정을 지켜보며 公론화가 자칫 空론화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만 하다.
탈핵신문 2017년 10월호
'오피니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고> 신고리5·6호기 공론화를 돌아보며… (0) | 2017.11.08 |
---|---|
일본이 다시 빠진 핵발전의 늪, 선거제도 때문! (0) | 2017.11.08 |
신고리5·6호기 공론화와 노무현 대통령의 그림자 (0) | 2017.09.18 |
천하에 쓸데없는 전문가들 (0) | 2017.09.08 |
탈핵, 그리고 고준위 핵폐기물 (0) | 2017.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