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고준위방사성폐기물 관리 기본계획(안)’을 둘러싸고 경주 지역이 주목받고 있다. 가장 먼저 충돌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더라도 경주는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의 시금석이 될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시민사회의 지향은 배제하고 경주 지역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쟁점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용어의 혼란이 생기겠지만, ‘단기저장시설=건식저장시설=사일로(캐니스터canister, 스테인리스 전용 용기)=맥스터(MACSTOR)’를 하나로 통일코자 한다.
정부계획, “단기저장시설 보상하겠다”…경주지역, “그럼, 기존 운영중인 시설은?”
정부의 보상금 대상이 갈등의 촉매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는 앞으로 건설될 고준위핵폐기물 ‘단기’저장시설에 대해서 보상을 하겠다고 밝혔다. 경주지역은 당장 “그럼 기존에 있는 건식저장시설은 어떡할래?”란 반응이다. 이는 매우 자연스런 요구다. 경주에는 이미 33만 다발 용량의 건식저장시설(=단기저장시설)이 운영 중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계획에서 기존 시설에 대한 보상을 제외했다. 정부의 입장을 굳이 대변하면, 똑같은 건식저장시설이지만 법적 지위로는 기존 시설은 ‘임시’저장시설이고, 신규 시설은 ‘단기’저장시설이 되는 셈이다.
경주핵발전소, 국내 고준위핵폐기물 발생량 52% 차지…1998년부터 5차례 저장시설 증설
경주 핵발전소는 중수로인 월성1~4호기와 경수로인 신월성1·2호기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의 고준위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 발생량은 2015년말 기준 총 40만8926다발(약 7806톤)이다. 중수로인 월성1~4호기만 따로 살펴보면 40만8734다발(약 7,725톤)에 이른다(전체 대비 약 99%). 이는 톤수 기준으로 우리나라 총 고준위핵폐기물 발생량의 약 52%에 해당한다.
이처럼 엄청나게 쏟아지는 고준위핵폐기물을 처리하기 위해 월성핵발전소는 우리나라 유일의 건식저장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이 건식저장시설이 정부에서 각 핵발전소에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단기’저장시설의 실체다.
1992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건식저장시설은 1998년, 2002년, 2005년, 2011년 등 총 5차례에 걸쳐 ‘사일로 300기와 맥스터 7기’로 그 규모를 확장해왔다. 이들 건식저장시설의 총 저장용량은 33만 다발(6,237톤)이다. 이마저도 2018년 포화가 예상되어 한국수력원자력(주)은 맥스터 7기(16만8000다발) 추가 건설을 정부에 신청했다. 지난 4월에 신청한 맥스터 7기는 이번에 발표된 정부 계획안에 따라 그 법률적 성격이 ‘단기’저장시설이 될 예정이다.
정부계획대로, ‘단기’저장시설 수용하면, 과연 ‘철수’할까?…경주, 오히려 시설 추가 건설 추진!
정부 계획의 핵심은 고리, 영광, 울진 지역의 핵발전소에도 경주처럼 ‘단기’저장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앞으로 최소 19년이 지나야(2035년)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장이 마련된다고 밝혔다. 이 19년 동안은 ‘단기’저장시설을 건설하여 시간을 벌겠다는 꿍꿍이다.
그런데 주민들이 ‘단기’저장시설을 수용하면, 정부는 앞으로 19년만 시설을 운영하고 철수하겠는가? 경주의 사례를 보면 정부의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하다. 정부는 이미 제249차 원자력위원회(1998년 9월 30일), 제253차 원자력위원회(2004년 12월 17일)에서 2016년까지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장 마련을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2016년 경주 시민에게 돌아온 것은 건식저장시설(맥스터 7기)의 추가 건설 추진이다. 이처럼 정부의 ‘단기’저장시설 계획도 결국 저장시설의 무한 증설로 이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중간·영구처분장 부지선정과 연관된 ‘2035년 처분장 마련’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인다.
지자체와 주민 권리 배제…고준위핵폐기물 저장시설, 지자체 ‘허가’가 아닌 ‘신고’로 증축 가능
정부는 각 핵발전소에 ‘단기’저장시설을 추진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 1992년을 시작으로 월성핵발전소에 33만 다발 규모의 건식저장시설이 건설되는 동안 경주시는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지방자치단체는 건축물에 대한 허가권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고준위핵폐기물 저장시설은 건축물이 아닌 ‘공작물’로 분류되어 건축 허가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동안 한국수력원자력(주)은 월성핵발전소가 소재한 양남면사무소에 ‘신고’만 하고 5차례에 걸쳐 고준위핵폐기물 건식저장시설을 증축해왔다.
정부의 이번 발표안에도 지방자치단체의 권리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단기’저장시설 건설을 당연시하면서, 지역 주민은 오로지 ‘보상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만 전전긍긍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경주지역은 ‘건축’ 관련 조례를 개정하여 경주시의 규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공작물’로 분류된 건식저장시설을 ‘건축물’로 분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행법은 이를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에서 규정하도록 하고 있다.
제한구역(EBA), 재설정 논란…경주 나아리 농성 주민들, 이주 여부?
월성핵발전소 앞에서 2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나아리 주민들의 이주 요구도 중요한 현안으로 부각될 수 있다. 정부는 핵반응로(=원자로)를 중심으로 일정거리를 제한구역(EBA)으로 설정하여 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월성핵발전소의 경우 반경 914미터를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주민 거주를 제한하고 있다. 주민들은 914미터 지점부터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으나 여러 이유로 이주를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월성핵발전소의 건식저장시설은 제한구역 설정에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의 ‘단기’저장시설 추진으로 제한구역 재설정이 거론될 여지가 커졌다.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의 전문위원들은 “기존의 원전 부지 내에 저장시설을 추가 설치할 경우, 기존 원전 부지가 확장되는 개념이므로 평가 결과에 따라 제한구역경계가 변경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구 쏟아지는 고준위 핵폐기물, 틀어막지 않고는 근본적인 대안 없다!
마지막으로, 경주 월성핵발전소(중수로)의 수명연장 중단이 전제될 필요가 있다. 월성1~4호기는 2015년말 기준 40만8734다발(약 7725톤)의 고준위핵폐기물을 양산했고, 이는 우리나라 총 고준위핵폐기물 발생량의 약 52%에 해당한다. 마구 쏟아지는 고준위핵폐기물을 틀어막지 않고는 근본적인 대안이 없다.
그런데, 월성1~4호기의 수명이 2022년부터 2029년까지 차례로 종료된다. 이렇게 폐쇄를 가정했을 때, 고준위폐기물의 추가 발생량이 맥스터 7기를 추가 건설했을 때의 저장용량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2019년 월성핵발소의 건식저장시설이 포화되어 맥스터 추가건설이 필요하다면, 최소한 월성1~4호기의 수명연장 중단을 우선 약속하고 공론화를 해야 한다는 게 경주지역 시민사회의 여론이다.
탈핵신문 2016년 7월호 (제43호)
이상홍 통신원(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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