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률에 대한 기억
“강선생님, 저랑 공통점이 있어요?”
“그래요, 뭔데요?”
“여름에도 따뜻한 물 드시는거요.”
이제는 고인이 된 김형률 님의 오월 추모제를 준비할 때마다 그와 함께 식사하며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찌 따뜻한 물뿐이랴. 20대 후반에 폐결핵을 앓은 이후, 난 한여름에도 전철이나 버스의 에어컨 바람 때문에 반소매의 웃옷을 입지 못했고, 봄가을에도 스카프를 늘 하고 다니고 기침을 시작하면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랬기에 어머니의 히로시마 피폭으로 대를 이어 고통받았던 한국원폭2세 피해자 고 김형률 님을 다른 이들보다 조금은 더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하더라도 돌아보면 ‘선천성면역글로블린결핍증’으로 자지러지는 기침을 하며 숨가쁜 하루하루를 살면서 절박하게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외쳤던 그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그가 제기한 미해결 과제…원폭2세환우들의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
2005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푸르른 오월에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2002년부터 ‘한국원폭2세환우회(患友會)’ 초대회장으로서, 또 수많은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호소하며 시민단체와 함께 2003년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면서 특별법 제정활동을 구체화해갔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 범죄피해자이면서 핵 피해자들인 원폭2세환우와 원폭피해자 가족들은 원폭피해자문제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사회의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하도록 강요하여 원폭2세환우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거나 인간된 권리를 다 누리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소외와 차별을 받으며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의 뜻은 2대 회장인 정숙희 님과 같은 무혈성괴사증으로 고통받았던 3대 회장인 한정순 님으로 이어져갔다.
‘우리는 핵의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했는지, 아픔이 대물림되어 아직도 그 전쟁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삶에 혐오감마저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자가 되어야 했고, 원폭피해자가 되어야 했고, 재산도 없이 거지가 된 것도 모자라 자녀들에게까지 아픈 고통을 물려주었습니다. 이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는데도 인정조차 하지 않으니 말이나 됩니까…… 저도 대퇴부 무혈성괴사증으로 양쪽 다리에 인공관절수술을 받게 되고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인공관절 수명은 10년, 그 후 다시 수술을 받아야 했기에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3세인 내 아들도 27세 나이로 선천성 뇌성마비인데, 아직도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누워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픈 것조차도 아프다 말하지 못하고, 죽어가면서도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게 현재 원폭2세환우들의 실정입니다…… 모든 전쟁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승리한 나라가 있으면 패한 나라도 있겠지만, 전쟁의 끝은 피해자만 남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건 핵의 전쟁입니다.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핵의 피해자인 자녀는 태어나는 날로부터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핵의 전쟁 터널은 끝이 없습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 원자폭탄이 없고 전쟁이 없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의 아픔은 없어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정부나 일본정부도 인정해주리라는 믿음 하나로 힘닿는 데까지는 활동하고자 합니다. 길고 긴 터널에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신 환우분들을 위해서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분들은 하늘에서, 우리는 땅에서 외치고 또 외쳐, 일본정부와 미국정부가 책임 보상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국회도 꼭 특별법안이 제정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길 바랍니다.’
절실히 필요한, 치료·요양, 복지시설, 인도적인 지원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릴 정도로 원폭피해자가 많이 계시는 합천에는 다운증훈군, 정신지체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원폭2세환우분(이하, 2세환우)들이 많이 살고 계시는데, 부모님들의 마음은 다 똑같다. ‘내 죽고 나면 이 아픈 자식을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다. 2세환우분들은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살아남아도 오래 살아야 30대, 40대에 죽는 경우가 많다. 1세 어르신들도 시간이 없지만, 2세환우분의 대부분이 40대가 많아 역시 시간이 없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합천에 아픈 2세환우분들을 위해 쉼터가 절실하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대물림의 고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후세들에게 역사교육·인권교육·평화교육의 장이 될 수 있는 자료관을 합천에 세워야 한다고 말 씨앗을 뿌리고 다녔다. 2세환우분들이 자꾸 돌아가셔서 더 이상 늦으면 안되겠다싶어 본격적으로 공간을 찾아보고 구체화시킬 준비작업을 시작하여 2010년 많은 이들과 단체의 노력으로 2세환우의 쉼터인 ‘합천평화의집’을 꾸리게 되었다.
원폭피해자1세의 경우는 피폭자건강수첩을 가지게 되면 부족하나마 인도적인 차원의 원호수당을 매달 33,800엔을 일본으로부터 받고 있고, 진료비의 지원도 받는다. 또한 합천에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이 있어, 1세 어르신들을 수용해 복지시설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입주를 희망하는 분들이 많아 기다리는 분들이 더 많은 현실이다. 2세의 경우는 한·일 정부의 어떠한 지원도 복지시설도 없기에 더욱 열악한 상황이다. 아픈 2세환우의 경우는 30대나 40대에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아 시간이 많지 않기에 특별법안만 통과되는 것만을 기다릴 수 없어, 쉼터와 더불어 치료·요양 전문시설이 절실한 상황이다.
또 다른 김형률의 삶이 계속되도록, 절망이 아닌 희망의 대물림을!
히로시마에서 어머니가 피폭을 당해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으로 70% 폐기능을 잃어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다가, 2005년 5월 29일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김형률 님. 원폭2세환우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원폭피해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글을 남겼다.
‘저와 같이 평생을 병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며 자식된 도리, 형제된 도리, 인간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에 친생자 포기 각서를 통해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끊는, 마음 아픈 사연도 있습니다.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마음 한편으로 죄 아닌 죄의식을 가지며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가셔야 합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할 수 없는,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행복권마저 박탈하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가족간에 의사소통마저 단절되어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할 수 없으며, 평생을 세상에 대한 원망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많은 원폭2세환우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누구하나 책임져주지 않고 평생동안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인권유린이며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그리고 미국정부 모두 다 인권유린에 대한 법적인,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제동원 관련 특별법안 제정을 위한 운동을 하면서 2002년 여름 처음 김형률 님을 만났고, 다시 소외된 원폭피해자를 위한 특별법안 제정 운동을 함께 하면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제 고인이 된 그를 위해 ‘김형률추모사업회’의 운영위원장으로서 또다시 그의 10주기 추모제를 준비하고 있다. 작년 가을, 그의 어머님께 어머님이 태어나신 히로시마에 가보시겠냐고 했더니 우시면서 가보시겠다고 하셔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어머님을 모시고 히로시마로 왔다. 어머님이 히로시마에 계시는 동안 고 김형률님의 아버님도 아들의 이름으로 뉴욕 NPT(핵확산금지조약)대회 관련한 집회에서 한국의 원폭2세환우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계신다. 어제는 어머님이 태어나시고 피폭을 당한 곳, 당시 조선인이 많이 살았던 후나이리가와구치쵸에 함께 갔다. 어머님이 어릴 때 놀았다고 하시는 강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에 잠기셨을까. 초기 치매로 언제 기억의 가닥이 끊길지 모르고, 다시 못 올지 모를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당시 조선인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어머님은 1945년 8월 6일, 피폭당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님과 언니를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많은 2세 환우와 만나면서 정신지체장애나 다운증후군 등의 장애를 가진 분들은, 바다를 본 적이 없거나 외출의 기회가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들이 또 다른 김형률이기에 나는 그분들을 위해 평화나들이를 기획하여 바다를 보러 갔다. 그리고 지금 그의 어머님을 모시고 히로시마 평화나들이를 하며 2005년 고 김형률 님의 49재 때, 추모시 내용 일부에 고 김형률 님께 약속했던 내용을 다시 떠올려본다.
당신은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저에게
어머니로 누이로 동지로 해야 할 숙제를 남겼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갈 수 없었고, 또 할 수 없었던 일들,
당신이 가고 싶었던 노래방, 당신이 보고 싶었던 바다를
이제는 또다른 당신인 2세환우들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그때 당신의 따뜻한 미소도 언제든 동행하리라 믿습니다.
고 김형률 님의 뜻을 이어, 또 다른 김형률의 삶이 계속되도록 우리는 핵 피해자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 절망의 대물림이 아닌, 희망의 대물림을 위하여 어떤 활동을 해야 할까. 이 땅의 남과 북 어느 쪽도, 일본을 포함한 지구촌 어떤 지역에도 핵으로 인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 전쟁 없는 세상과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각자의 현장에서 노력과 실천이 계속되기를……
강제숙(김형률추모사업회 운영위원장,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공동대표)
2015년 5월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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