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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 회장 김형률의 반핵인권운동

 한국원폭2세환우회 초대 회장 김형률의 반핵인권운동

 

전진성(부산교대 교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는 당시 한국인 7만명이 피폭되고, 그 중 4만명이 숨졌다고 한다. 살아남은 이들의 2~3세들 중, 유전을 통해 피폭 후유증을 앓고 있는 이들이 있다. 1300여명의 등록회원이 있는 한국원폭2세환우회(患友會), 전국적으로 75~1만명 가량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형률(1970~2005)은 핵폭탄 피해자 2세다. 그는 2002년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 처음으로 스스로 그 존재를 드러냈고, 3년간 불꽃같은 활동을 전개한 뒤 쓰러졌다. 다가오는 529일은 그의 10주기로, 함께했던 이들이 10주기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핵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면 핵무기’,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핵발전이다. 탈핵신문은 김형률 10주기를 앞두고, 김형률의 평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 2008)를 집필한 전진성 교수에게 그의 삶을 조망해달라고 요청했다. - 편집자 주

 

 

 

 

■ 김형률, 국내 최초 핵폭탄 피해자 2세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스스로 공개

한국원폭2세환우회(患友會) 김형률 초대 회장의 서거 10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2005529일 새벽 만 서른다섯을 앞둔 나이로 생을 마감한 김형률은 한국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신 분이다.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핵폭탄피해자 2세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기력을 소진해갔다. 아직 핵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부재하던 시절에 그는 핵을 역사나 정치, 혹은 기술적 사안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했던 선각자였다. 세상을 떠나기 약 3년 전인 2002322일에 그는 한국청년연합회(KYC)’ 대구지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자신이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한 어머니를 둔 핵폭탄2세로서 핵폭탄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사진 제공 : 윤정은>

 

병약한 몸으로 3년간의 열정적 활동, 그리고 맞이한 죽음

그는 200385일 총8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원폭2세 환우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를 발족했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으며, 이에 따라 20048월부터 12월까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의 핵폭탄 피해자 2세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는 핵폭탄피해자를 위한 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으며, 2005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제연대 협의회에 참석했다. 동경에 다녀온 닷새 만에 그는 피를 토하고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동경에 다녀올 때쯤 그는 핵폭탄 후유증인 폐렴 증세로 이미 정상적 폐 기능의 80%를 잃은 상태였다. 과연 어떤 간절한 염원이 있었길래 이 병약한 젊은이는 그토록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야만 했던 것일까?

 

일본 및 한국정부도 외면한, 한국의 핵폭탄 피해자들

그간 TV와 언론매체를 통하여 1945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에 많은 한국인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들 희생자는 대부분 경상남도 합천과 경기도 평택에서 건너간 사람들로 일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으로 일자리를 구하거나 전시의 강제부역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생존자의 대부분은 귀향했으나 고국으로부터 아무런 의료적, 경제적, 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질병과 가난의 대물림 속에서 살아왔다.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내세우는 일본도 한국 핵폭탄 피해자들을 철저히 도외시했다. 1965년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질 때 맺은 이른바 청구권 협정으로 국가적 보상은 완료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한국 핵폭탄피해자들은 피폭 후 20여 년이 지난 1967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결성(1971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하여 끈질긴 권리투쟁을 벌였으나 계속되는 세상의 무관심을 타파하지는 못했다. 핵폭탄 피해자의 문제는 일제 과거가 한국사회에 남긴 상흔의 일부임이 분명하다.

 

핵폭탄 피해자의 고통은, 유전을 통해 2~3세에게로 대물림되고

하지만 문제는 그 이상이다. 그것은 단지 정치적 이슈나 사회정의, 또는 역사적 해석의 문제만은 아니다. 핵폭탄 피해자의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해 가장 본원적인 조건을 이루는 과 관련된다. 김형률은 자신이 운영하던 한국원폭2세환우회 홈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우리들의 몸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 20세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침략전쟁과 식민지 수탈정책이라는 광기의 역사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연장되어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2003. 10. 16) 그의 말처럼, 핵폭탄 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한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를 통해 고스란히 재생된다. ‘광기의 역사는 역사적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2, 3세의 에 생생하게 현존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핵폭탄2세환우의 존재야말로 핵폭탄 피해자의 문제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접근방식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아직 1세의 문제도 해결이 안된 마당에 왜 성급히 2세를 운운하는가? 더욱이 2세 중에는 건강한 사람이 더 많은데 자칫 이들이 사회적인 편견에 시달리게 될 소지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의구심은 김형률의 자기희생을 통해 해소되었다. 그의 목숨을 건 헌신을 통해 핵폭탄 피해자의 문제, 더 나아가 핵 문제 일반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져야할지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주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형률은 자신의 실존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는 지병을 개인적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핵폭탄 피해자 인권의 문제로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 역사적 상흔임을 몸소 체득하고 이를 치유하기위해서는 사회와 국가가 나서야한다는 점을 부단히 역설했다. 핵폭탄 유전병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한국인 핵폭탄 피해자의 현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김형률의 노력은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뒤늦게 꽃핀 소수자의 인권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회적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김형률, 핵은 인간의 생명과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웠다!

김형률은 개개의 생명들이 감수해야했던 고통에 공감을 느끼며 이를 감싸안으려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탈핵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우리에게 분명한 원칙을 제시해준다. 비록 김형률은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핵발전 문제에 천착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가 현시점에 살아있다면, 분명 우리에게 사안의 핵심은 인권임을 역설했을 것이다. 핵무기이던, 핵발전소이던 간에, 핵의 군사적 혹은 평화적(?)’ 이용이던 간에, 핵은 인간의 생명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점, 그렇기에 우리의 반핵 내지는 탈핵 운동에서 항상 중심에 놓여야할 것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가 그 어떤 일보다도 환우회를 조직하는데 주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야말로 그가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반핵인권운동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었다. 평생 병마와 싸웠던 김형률의 앞에서는 어떠한 화려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언사도 다 거짓이었다.

 

핵폭탄 피해자 관련 특별법 제정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

김형률이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매진했던 핵폭탄 피해자 관련 특별법 제정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설상가상으로 이웃나라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했고 우리 사회에도 불안한 미래의 암영이 깊게 드리워져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기억해야한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핵폭탄 2, 3세 환우들이 보다 낳은 삶을 쌓아올릴 수 있는 반석이 되어 주신 김형률 회장의 유지를 되새겨야한다. 핵이라는 절대악을, 그것을 존립 가능하게 한 모든 탐욕과 거짓, 그리고 인간 경시의 풍조를 이 세상에서 반드시 몰아내야한다. 그가 진정으로 염원했듯이,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한다.”  

삶은 계속되어야한다는 김형률 회장이 이메일의 말미에 항상 붙이는 구호였다.

 

발행일 : 2015.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