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우노다 요코의 후쿠시마 소식
끝나지 않은 핵발전소 사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기 위해(1)
우노다 요코(宇野田 陽子) / 오하라 츠나키 편집위원 옮김
<* 사진 설명 : "후쿠시마 핵발전소 근처에 외롭게 서 있는 소나무. 많은 주민들이 쓰나미로 사망한 지역이어서 항상 꽃이 헌화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이은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곧 3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재해 발생 직후부터 많은 한국 분들이 지원을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심과 지원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적인 사고를 일으킨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는 지금도 방사성 물질을 방출시켜 바다와 하늘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웃나라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방사능 오염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을 주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폭발한 4기의 핵발전소 문제를 제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기 위해, 저는 후쿠시마에 정기적으로 다니기로 결정했습니다. 2011년 5월 이후 저는 미나미소마시(南相馬市,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반경 약 25km에 위치, 역자 주)를 중심으로 후쿠시마 현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니면 다닐수록 현지 사정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상황을 알면 알수록 ‘나는 아무것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통감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핵발전소 사고라고 하는 ‘프레임’을 통해서 직접적인 방사능 오염 피해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그 ‘프레임’을 접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을 때,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조교인 이마나카 테츠지(今中哲二) 씨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에서 배운 교훈 중 하나로 “핵발전소 사고가 나면, 그 주변 마을이 사라지고 지역 사회가 소멸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후쿠시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핵발전소에서 20킬로미터 권내 구(舊) 경계구역(2013년 5월 모두 해제. 귀환곤란구역, 거주제한구역, 피난지시 해제 준비구역으로 나눠졌음) 안으로 들어가면, 쓰나미가 덮친 해안이 지금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논밭에 표류한 배와 재해물의 대부분은 지금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해일이 도달하지 않았던 마을 중심부는 마치 인적 없는 호젓한 영화 세트장 같습니다. 허가를 받은 공사 차량이 통행하니까 신호등은 작동하지만, 길을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의 흔적은 분명히 그대로 남아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013년 10월, 오사카에서 온 방문단을 안내하기 위해 구 경계구역에 들어갔습니다. 그 방문단 속에, 거주하기 어려운 구역이 되어 버린 도미오카마치(富岡町) 출신의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재해를 입고 피난생활을 하기 위해 전국을 전전하다 지금은 오사카에서 살고 있는 대학생 남자입니다.
차량으로 이동할 때는 즐겁게 여러 가지 추억이나 지역에 대해 설명을 해 주던 그가, 20킬로 권내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습니다.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이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볼 때도, 그는 일단 차에서 내렸지만 잠시 후에 차에 돌아가서 혼자 가만히 웅크리듯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훗날 그는 “그렇게 되어버린 줄은 몰랐어요. 그 때 혼자서 갔었어야 했어요. 오사카 사람들하고 함께 있었으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더욱 슬펐어요.” 그때 느꼈던 아픈 마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핵발전소에서 몇 킬로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는데 사고 직후 긴급히 피난을 해야 했고, 이후 줄곧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던 그는, 갈아입을 옷도 핸드폰 충전기도 못 챙기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가 핵발전소에서 7km 밖에 안 떨어진 집에 돌아갈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겁니다. 그는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현실에 대해 본인이 지금까지 그리 심각하게 자각하고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해 자신을 깊이 탓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보고 저 또한 생각이 짧았다고 후회했습니다.
제가 구 경계구역 북쪽에 있는 미나미소마시립종합병원에서 의료지원 직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거기서 만난 나이 드신 환자분들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대부분이 강제 대피명령을 받아 미나미소마시에 있는 가설 주택으로 이주한 분들이었습니다. “계속 자치 회장을 맡아 사람들 상담을 받거나 했지만, 지금은 가설주택이니까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아요.”, “내 논밭에서 다시 농사를 짓고 싶지만, 생전에 돌아가는 것은 아마 힘들거야.”
정성으로 가꾼 논과 밭, 반세기를 넘어 이어온 공동체를 순식간에 잃어버린 분들의 목소리는 조용하면서도 핵발전소의 부조리를 강렬히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국책으로 진행되어온 핵발전소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그들의 부당함을, 우리는 지식으로 소화해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한 번 사고가 나면 반경 20km 내 구역이 수십년에 걸쳐 거주 불가능 지역이 되고, 훨씬 광범위한 지역이 방사능으로 오염돼 수많은 사람들이 그 토지와의 연결이 끊깁니다. 전승 문화가 소멸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후쿠시마를 중심으로 방사능 피해를 본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핵발전소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핵발전소에 대한 어려운 공학적인 지식을 배우지 않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미나미소마시의 미유키 씨. 본인도 신체장애가 있는데다가 자폐증 자식까지 키우고 있어서 피난가기 힘들었던 그녀는, 핵발전소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있는 자택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 직후에는 30킬로 권내의 물류유입이 멈추었고, 행정 서비스도 기능하지 않아 아사(餓死) 직전까지 몰리게 되었습니다. 민간 장애인지원단체가 와서 먹을거리 지원을 해주어서 겨우 생명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폭에 대한 불안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내가 건강한 몸이라면 아이를 대피시켜 줄 수 있을 텐데…”라고 했던 그녀의 말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후쿠시마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 반. 후쿠시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각오를 다지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정부 발표를 그대로 믿고, 태연히 살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곳에서 영위하고 있는 그들의 삶에 동행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저는 앞으로도 후쿠시마를 계속 다닐 각오입니다.
우노다 요코(宇野田 陽子) :오사카 거주. 1996년부터 반핵아시아포럼(No Nukes Asia Forum) 멤버로 핵없는 미래를 지향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핵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관서(關西) 지역으로 피난해온 사람들의 지원과 동북(東北)지역 현지 지원 활동에 주력. 동일본에서 오사카로 옮겨온 피난민에 대한 이주지원과 상담지원, 특히 어린이들의 피난 생활보조 활동을 하고 있다. 현지 지원 활동으로써는 후쿠시마현을 중심으로 매월 동북지역을 방문해 어린이들의 놀이터 활동지원과 동시에 언어청각사로 의료지원을 하고 있다.
발행일 : 20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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