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밀양임을 확인!
송전탑 대신 희망을 약속한, 1박2일 밀양 희망버스의 기록
이보아(녹색당 탈핵특위 위원장)
전국 방방곳곳, 2천여명이 밀양희망버스 탑승
11월 30일(토) 아침, 이 땅 곳곳에서는 밀양 희망버스를 타기 위한 준비의 손길이 바빴다. 침낭과 손전등, 밀양에 드릴 선물까지 각종 준비물을 손에 든 탑승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참가였기에, 누가 얼마나 올지도 정확히 예측하기 힘들었다. 어떤 곳은 버스를 1대만 준비했다가 2대가 되기도 하고 승합차를 섭외하기도 하는 등 기분 좋은 비명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밀양 송전탑과 운명을 같이 하는 경북, 밀양의 이웃이자 핵발전소가 밀집된 부산, 울산, 경남, 전남·북은 물론이고, 강원과 당진 등 기존 초고압 송전탑 피해지역, 대표적 전력 소비지인 서울과 경기, 그리고 심지어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까지, 전국의 26곳에서 2천여 명의 탑승객이 출발했다.
버스만이 아니었다. 울산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태화강을 따라 76.5km를 걸어 밀양에 도착한 울산희망도보팀도 있었고, 창원에서는 10여 명의 희망자전거팀이 출격했다. 올 겨울 마음만 아니라 몸도 따뜻하게 보내시라고 직접 제작한 적정기술 난로를 밀양에 가져온 ‘난로원정대’도 있었다. 또 하루 먼저 도착한 파견미술팀은 밀양 희망버스를 환영하며 보라마을 102번 철탑 예정지에 ‘밀양의 얼굴들’을 설치하기도 했다.
밀양 희망버스는 가는 길에도 희망을 나누었다. 심야노동을 철폐하기로 한 노조와의 합의를 뒤엎고 용역을 투입해 조합원들을 폭행한 유성기업에 맞서 50일이 넘게 옥천IC 근처에서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의 인증샷을 찍어 보냈고, 대구 건설노조의 고공농성 현장을 지지 방문하기도 했다. 밀양 희망버스가 출발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희망과 설렘을 볼 수 있었다. 희망버스는 희망버스니까.
경찰의 봉쇄 풀고, 공사 재개 후 첫 현장 발길
공사가 재개된 지 61일 만에 처음이었다. 96번, 110번, 122번 송전탑 공사 현장을 처음 눈으로 확인한 밀양 주민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동안 주민들은 공사 현장은커녕 현장으로부터 수 km 떨어진 곳에서부터 경찰에게 막혀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던 상황이었다. 밀양 희망버스가 도착한 11월 30일도 4천명이 넘는 경찰이 동원된 상태였다. 하지만 반드시 공사 현장을 밟고 오겠다는 주민과 밀양 희망버스 참가단의 의지가 경찰의 방해보다 좀 더 강했다.
현장마다 수백 명의 밀양 희망버스 참가자와 주민들이 본래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을 중간 중간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며 끝까지 올랐다. 주민들은 전국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고, 또 그 힘으로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경찰의 장벽을 뚫었다는 데 고마움으로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물론 가는 길이 평탄치는 않았다. 경찰은 가파른 비탈길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진압작전을 펼쳤고, 이 때문에 주민과 참가자들은 여러 번 위태로운 상황을 맞기도 하고 허리를 다치는 부상자 등도 발생했다. 또 해가 저문 뒤에도 하산하려는 참가자들을 가로막거나, 경찰을 폭행했다며 3~4명의 참가자들을 고착시켰다가 스스로 마땅히 증거를 대지못하며 풀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과정들에서 법 위반 사실 고지 없이 시민을 억류하는 데 항의하자, 경찰 지휘관이 ‘법을 말할 필요 없다’고 발언하는 등 그동안 무법천지였던 밀양의 상황을 짐작케 했다.
그렇게 처음 찾은 3개의 공사 현장에는 대부분 공사 업체 직원과 포크레인이 올라와 있었고, 땅은 처참히 파헤쳐진 상태였다. 이를 바라보는 희망버스 참가자 그리고 주민들의 마음이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내려오는 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걱정보단 희망이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막고 서로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이길 때까지 싸울 것이니, 이길 수밖에 없다!”
공사 현장을 방문한 이들을 비롯해 밀양 주민과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하나 둘 밀양역에 모이기 시작했다. 앞서 밀양 희망버스를 타고 온 탑승객들뿐만 아니라 개별 차량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뒤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늘고, 일을 마치고 온 밀양 시민들까지 가세하면서 밀양역에는 3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문화제가 시작됐다. 함께 목표를 이루고 돌아온 사람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기쁨으로 빛났고, 이어지는 공연과 발언은 희망으로 가득 찼다.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오른 위양리의 할배(권영길, 76)는 “이길 때까지 싸울 것이니, 이길 수밖에 없다!”고 했고, 평밭마을의 할매(손희경, 79)는 “우리는 목적지가 같은 한배를 탔다. 여러분이 주민과 함께한다면 송전탑 건설을 끝내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문화제의 뜨거운 열기는 밤늦도록 식지 않아 11개의 마을로 흩어진 주민과 참가자들은 마을마다 돼지를 잡거나, 소머리를 고아 나누고, 전과 호박죽 등으로 새벽까지 잔치를 이어갔다.
우리 모두가 ‘밀양의 친구들’, ‘밀양의 얼굴들’
첫째 날의 거의 빈틈없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밀양 희망버스의 둘째 날 일정 역시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마을별로 30일에 가지 못한 공사 현장에 추가 진입을 시도하기도 하고, 참가자들이 준비해 온 선물과 공연을 나누기도 했다. 마지막 집회에서 쓸 현수막을 함께 꾸미기도 하는 등 분주한 일정을 마무리하고, 단체 사진을 찍으며 떠날 시간이 다가옴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마을별 일정을 마친 주민과 참가자들은 다시 하나 둘 보라마을로 모이기 시작했다. 보라마을의 송전탑 예정지와 미리 도착한 파견미술팀이 설치한 ‘밀양의 얼굴들’을 둘러 본 사람들은 어떤 상징적인 장소에 모였다. 어쩌면 8년의 싸움을 가능케 했던, 밀양의 문제를 처음으로 바깥 세상에 알렸던, 고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이 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마무리 집회가 열렸다.
모두가 한 마음이고, 모두가 알았다. 명분 없는 공사 강행이 중단되지 않는 한, 지역의 희생을 강요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트릴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전환되지 않는 한, 우리가 다시 모일 것임을. 밀양의 친구들은 다시 이곳을 찾을 것임을 함께 확신할 수 있었다.
발행일 : 20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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