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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④ _ 일본 ‘핵발전 안전신화’의 시초

∥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④

일본 핵발전 안전신화의 시초

 

 

일본의 핵발전 안전신화를 추적해보면, 1950년대 후반 콜더홀형 핵반응로 도입 과정에서 그 시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번 호에는 일본의 핵발전 도입과 안전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했다.

 

콜더홀형 핵반응로(흑연감속 탄산가스냉각로)는 영국이 핵무기 개발을 위한 플루토늄 생산을 주된 목적으로 설계했다. 천연우라늄을 연료로 하며, 연료봉은 운전 중에 교환할 수 있다. 흑연을 감속재로, 이산화탄소를 냉각재로 사용한다. 셀라필드에 설치된 콜더홀형 핵반응로가 세계 최초로 상업운전을 시작했으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전력생산 면에서는 경제성이 낮았고, 이후 해당 형태 핵반응로는 개량해야 했다. 일본에서는 166kW 출력의 도카이발전소’(핵발전소)라는 이름으로 1966725일 상업운전을 시작했으며, 1998331일까지 가동되었다. 그런데 1950년대 후반 콜더홀형 핵반응로 도입 과정에서 일본 핵발전 안전신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 측 조사단의 영국 방문과 핵발전 안전신화의 발아

 

일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이던 쇼리키 마츠타로(이하 쇼리키)는 취임 2주 만인 1956113원자력위원회의 설립에 관하여라는 성명을 통해 5년 이내에 일본에서 상업용 핵발전을 실현하고 싶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른 위원들, 특히 물리학자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독자적으로 핵기술을 개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핵반응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던 쇼리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영국원자력공사의 크리스토퍼 힌튼이 콜더홀형 핵반응로 영업을 위해 쇼리키에게 접근했다. 쇼리키의 호의적인 반응에 크리스토퍼 힌튼은 요미우리 신문의 초청 형태로 1956516일부터 30일까지 일본을 방문하여 콜더홀형 핵반응로를 홍보했다. 영국 측은 1kW당 약 25전이라는 저렴한 발전단가를 제시했고, 마침 미국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있던 쇼리키는 마음속으로 영국의 핵반응로를 구입하기로 정했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영국으로부터 핵반응로 구입이 미일관계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했다. 따라서 외무성이 시간을 벌고자 진행한 것이 195610월의 방영원자력조사단영국 파견이었다.

 

해당 조사단은 일본의 원자력위원회, 원자력국, 원자력연구소(현 원자력연구개발기구), 학계, 전력회사, 산업계 인물로 구성되었고, 영국의 콜더홀 핵발전소와 윈드스케일 재처리시설 등을 방문했다. 조사단은 콜더홀 핵발전소를 보며 생각보다 작은 규모와 간단한 장치 구조에 일본도 기술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콜더홀형 핵발전소는 천연우라늄을 사용하므로 우라늄 농축 플랜트와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고, 흑연과 탄산가스도 당시 일본의 공업 기술을 통해 공급할 수 있는 등 경수로에 비해 접근성이 있었다.

 

하지만 조사단은 콜더홀형 핵반응로의 흑연을 쌓아 올린 구조가 지진 다발국인 일본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사단은 뒤늦게 영국 측에게 내진설계에 관해 문의했으나 지진이 잘 발생하지 않는 국가인 영국은 명확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쇼리키의 강한 도입 의지가 있었고, 핵반응로 수입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조사단도 어떻게든 지진 대책을 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귀국 후 원자력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전반적으로 영국 기술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으며, 경제성에 대해서도 낙관적이었다. 당시 핵발전 단가는 화력발전보다 높았음에도 미래에는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면밀한 계산 결과를 토대로 한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내진설계에 대해서도 영국 측의 해답을 들을 수는 없었으나, 해당 핵반응로가 본질적으로 안전하고, 설계변경을 통해 내진설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확실한 안전 대비책 없이 핵반응로의 절대적인 안전성을 주장하고, 기술관리를 통해 위험을 막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인데, 이는 핵발전소 안전신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핵발전소 도입에만 급급했던 일본은 이처럼 근거 없이 안전하다고 합리화하며 콜더홀형 핵반응로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실패 사례가 된 도카이발전소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관계성

 

 

조사단 귀국 후 쇼리키는 콜더홀형 핵반응로 도입을 발표했는데, 이는 핵발전소 개발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으로 이어졌다. 지역 독점 체제인 9개의 전력회사(현재는 오키나와 전력까지 포함하여 10)가 핵발전소를 개발할지, 국가가 설립한 전원개발주식회사가 이를 담당할지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리키가 민간 측을 지지하여 국가 20%, 전력회사 80%의 출자로 일본원자력발전주식회사가 설립되어 콜더홀형 핵반응로 운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19571010일 영국의 윈드스케일 핵반응로 1호기에서 불이 난 심각한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사고는 영국 핵발전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고였으며, 스리마일과 같은 국제원자력사고등급(INES) 기준으로 5등급 판정을 받았다. 이후 12월 영국은 일본에게 새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영국의 핵반응로가 일본에서 가동하다가 사고가 발생해도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을 추가하자는 것이었다. 쇼리키는 분노했지만 면책조항은 이미 관행이 되어있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콜더홀형 핵반응로는 영국에서 제작하고 조립해서 넘기면, 일본이 이를 받아 운전하면 되는 턴키방식(turn-key)으로 도입되었다. 또한 영국이 내진설계를 추가하여 개량형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 운전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운영 주체인 일본원자력발전주식회사는 여러 가지 안전대책을 취했기 때문에,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은 1958616일 영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하였고, 19591214일 콜더형 핵반응로 설치허가를 내려 1960116일 착공했다. 해당 핵발전소는 도카이발전소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도카이발전소는 일본이 추가적으로 내진설계를 해야 했고, 비용도 추가되었는데, 이는 주도권을 가져간 전력회사들이 부담했다. 이를 계기로 전력회사들은 이후에 수입하는 핵반응로의 비용을 엄격히 심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도카이발전소는 실패 사례가 되었고, 일본은 이후 미국의 경수로형만 수입하게 되었다. 도카이발전소의 운영 주체인 일본원자력발전주식회사도 존재감을 잃었고, 일본의 핵발전소는 전력회사들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

 

도카이발전소의 사례는 신속한 핵반응로 도입과 핵기술 개발을 위해 안전신화를 형성함으로써 일본 핵기술체계의 치명적인 약점이 기술 도입 초기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안전신화의 발아 이외에도 다른 약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핵발전의 안전성보다는 경제성을 중시하는 체질 형성이다. 도카이발전소 이후 경제성을 엄격하게 심사하게 된 전력회사의 행태가 사고의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 후쿠시마의 사례다.

 

△ 마크Ⅰ형 핵반응로(좌측)와 가압경수로형(우측)의 규모 비교. 노란 선이 격납용기이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이 압력용기이다. 사진은 NHK E테레의 다큐멘터리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막을 수 없었는가>의 한 장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의 마크은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사(GE)가 경제성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설계한 핵반응로다. 경제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격납용기의 크기가 작아 사고 발생 시 냉각시스템에 여유가 없고, 증기가 압력용기에서 격납용기로 새어나갈 시 격납용기가 이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 사고 전에도 있었다.

 

결국 마크은 노심용융으로 발생한 다량의 수소로 인해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1호기와 3호기에서 수소폭발을 일으켰다. 특히 3호기는 재처리로 추출한 플루토늄과 우라늄의 혼합산화물인 MOX 연료를 사용하여 경수로에서 운전하는 플루서멀(Plu-thermal)이 진행 중이었다.

 

일본의 과거 원자력 종사자 등은 후쿠시마 3호기는 플루서멀 운전 중이었던 점과 1호기와는 다른 폭발모습을 토대로 핵폭발이 아니었냐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도쿄전력은 공식적으로 수소폭발이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사고 원인은 성급하게 형성한 핵기술체계의 근원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아사히신문 취재반(2019), 『그럼에도 일본인은 원전을 선택했다』, 김단비 역, 호밀밭

 

글쓴이: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수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9월(9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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