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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③ _ 이루지 못한 ‘원자력의 아버지’의 야망

 

기획연재 _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③

 

원자력' 추진의 뒷배경과 이루지 못한 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닛폰TV의 사주이자 70세를 바라보는 신인 정치인이었던 쇼리키 마츠타로(이하 쇼리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일본 내에 마이크로 통신망을 구축하여 당시 유망한 시장이라고 평가되던 방송과 통신사업의 인프라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쇼리키는 일본 정부의 승인하에 미국을 설득하여 달러를 차관해야 하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러던 과정에 쇼리키는 자신이 총리가 되면 이러한 것들을 용이하게 실현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와 같은 계획을 세우던 쇼리키에게 상업용 핵기술 도입은 총리가 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명확한 철학과 방향성을 가지고 추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즉 상업용 핵기술의 장래성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과도한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총리가 되는 데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쇼리키는 늦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하여 하루라도 빨리 총리가 되기 위한 업적을 만들기 위해 상업용 핵기술 도입과 개발 역시 서둘렀다.

 

 

원자력정책의 전개와 핵무기 개발 의도

 

 

일본에서 원자력의 아버지라고 불린 쇼리키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CIA의 비밀문서에서 쇼리키 파일이 발견되면서부터이다. 와세다대학의 아리마 테츠오 교수는 관련 문서들을 추적하며 쇼리키가 CIA로부터 포담이라는 암호명으로 기록된 스파이였던 점과 핵기술을 도입한 것은 총리가 되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原発正力CIA(원전쇼리키CIA)를 통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CIA는 쇼리키가 정계와 재계에서 인맥이 넓은 점과 강한 반공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근거로 자신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시 미국은 일본 국민들에게 종래의 음성(라디오)보다 효과적인 영상(TV)을 통해 친미 프로파간다를 확산하고, 공산주의의 전파를 막으려는 계획을 세웠기에 일본 최초로 민영방송국을 설치하려던 쇼리키와 이해관계가 겹쳤다. 관련 공작들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쇼리키는 CIA와 교섭하며 일본의 상업용 핵기술 도입 추진에도 속도를 냈다.

 

1950년대 중반 당시에는 아이젠하워의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연설 이후 각 국가에서 상업용 핵기술 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95432일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필두로 일본개신당 의원들이 첫 원자력예산안을 제출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이후 71~73(1982-1987)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일본의 핵무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87미일원자력협정개정을 통해 30년간 플루토늄 추출에 대해 미국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되게끔 협상을 이끌어내 일본이 자유롭게 재처리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연 인물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제출한 첫 원자력 예산안 총 25000만엔 중 23500만 엔이 원자력평화이용조성비라고 나와 있는데, 이는 잘 알려져 있듯 우라늄-235에서 따온 것이며, 나머지 1500만 엔은 우라늄 자원조사비명목으로 계상되어 있었다. 엉성하고 용도가 명확하지 않은 예산은 신속히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던 와중 1954627일 소련의 오브닌스크 핵발전소가 세계 최초로 전력망에 연결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핵발전을 상용화하기 전에 소련이 이룬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자국의 상업용 핵기술 확산을 통해 우호국들을 포섭하고자 했고, 이 대상에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일본은 19551115미일원자력연구협정을 체결하였다. 최대 20%의 농축도를 가지는 우라늄-2356kg까지 받는 협정이었는데, 평화적으로 이용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957827일에는 해당 협정을 통해 제공받은 실험로 JRR-1이 첫 임계 성공이라는 성과를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협정 체결 전까지 적극적이었던 미국은 이후에는 쉽사리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았는데, 적국이었던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당 협정 체결 전까지 일본에서는 논쟁이 전개되었다. 협정을 둘러싸고 쇼리키 마츠타로와 산업계를 중심으로 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적극파와 신중파로 갈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과학자 집단인 일본학술회의는 미국의 군사 행보에 휘말릴 것이라며 협정을 반대했다. 당시 다수의 일본 과학자들은 상업용 핵기술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핵무기나 상업용 핵기술이나 결국 같은 기술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포함한 신중파는 미국의 압박과 쇼리키의 의지를 이기지 못했다. 이후에도 일본학술회의는 상업용 핵기술 개발에 원칙을 추가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1955년 제정된 원자력기본법에 민주, 자주, 공개라는 원자력삼원칙으로 포함되었다.

 

195611일에는 원자력정책을 추진하는 기관으로 원자력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쇼리키였고, 위원으로는 1949년 노벨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를 포함한 물리학자 3명과 경제학자 1, 재계 인물 1명으로 구성했다. 쇼리키는 일본 정부에 ‘1956년도 원자력개발기본계획에 대해를 제출했다. 해당 계획에는 선진국의 핵기술을 추격하려는 의지와 함께 기초연구 육성, 핵융합 개발 외에도 천연우라늄 중수형 핵반응로 1기 설치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해당 핵반응로를 통해 플루토늄을 시험적으로 생산할 것이라 언급하고 있어 핵무기 개발 의도를 의심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이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은 추후 공개된 내부문서들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다.

 

 

영국제 핵반응로 수입과 쇼리키의 정치적 몰락

 

 

일본의 이와 같은 목표는 영국제 콜더홀형 천연우라늄·냉각가스로의 수입을 통해 이루려는 듯했다. 해당 핵반응로는 영국 셀라필드에 있는 콜더홀형과 같은 형태로, 영국이 핵무기 개발에 사용할 플루토늄 생산과 발전을 겸하기 위해 설계한 마그녹스(Magnox) 핵반응로이며, 영변 핵반응로 역시 마그녹스를 모델로 하여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마 테츠오 교수에 의하면, 협정 체결 후 미국의 태도 변화에 CIA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던 쇼리키에게 영국이 콜더홀형 세일즈를 위해 접근했고, 업적이 필요했던 쇼리키는 영국으로부터 핵반응로를 구매하기로 일찍이 결심했다. 미국은 이를 계기로 일본의 핵무기 개발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본 최초의 상업용 핵발전소인 도카이발전소. 1998년 3월 31일 영업운전을 종료했다. (사진=일본원자력발전주식회사 홈페이지)

 

 

하지만 콜더홀형 핵반응로는 구조상 지진이 빈발하는 일본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던 것에 더해 영국 역시 전범국가인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기술의 많은 부분을 비밀에 부치며 전수하지 않았다. ‘도카이발전소라는 이름으로 19667월 일본 최초의 상업운전을 시작한 해당 핵반응로는 경수로에 비해 경제성과 출력 등의 측면에서 효율이 낮았고, 결과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핵반응로 수입은 이 한 기로 끝났다.

 

일본은 도카이발전소의 사례를 통해 미국의 경수로가 더 우수하다고 평가했고, 일본의 상업용 핵기술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아울러 콜더홀형 핵반응로 도입은 쇼리키와 정계의 실력자이자 쇼리키가 속해있던 파벌의 수장인 코노 이치로와의 대립 구도를 야기하여 쇼리키가 정계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마이크로파 구상도 통신방송위성의 등장으로 인해 무의미해졌으며, 총리까지 꿈꾸던 쇼리키의 청사진도 끝나버렸다. 하지만 쇼리키가 급하게 추진한 콜더홀형 핵반응로 수입은 일본에서의 기술안착과 확대의 실패로만 끝난 것이 아닌 원자력 안전신화의 시작점이 되어버렸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有馬哲夫(2008), 原発正力CIA: 機密文書昭和裏面史, 新潮新書

原発史研究会(2018), 日本における原子力発電のあゆみとフクシマ, 晃洋書房

 

 

 

글쓴이: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수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8월(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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