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_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②
총리가 되고 싶었던 ‘원자력의 아버지’와 미국의 합동 공작
패전이 바로 앞에 다가왔음에도 ‘일억옥쇄’를 내걸며 세계를 경악시키고 셀 수 없는 희생을 만들던 일본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은 항복을 결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1945년 8월 13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였고, 8월 15일 정오에 NHK의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방송이 송신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이 알려진 순간이었으며, 한반도에서는 독립의 기쁨에 찬 환호가 울려퍼진 순간이기도 했다.
패전국인 일본에는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들어와 점령하기 시작했다. GHQ는 일본을 비군사화하고 민주화를 진행하였으며, 군부를 제거하는 등 개혁을 실시했다. 일본이 전쟁을 할 수 없도록 ‘평화헌법’도 만든 GHQ였으나 일왕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또한, 일왕에게 이른바 ‘인간선언’을 하도록 했지만 ‘상징적 천황제’를 통해 체제는 유지시켰다. 이는 맥아더가 일본 국민들의 반발을 피하고 간접통치 형태였던 일본점령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침략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죄도 하지 않고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악의 몰락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늘날까지 일본 우익세력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면피를 넘어선 정당화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또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도 식민지였던 한국의 6.25전쟁을 통해 ‘특수’라는 재기의 기회를 얻은 것에 더해 미국의 핵우산 체제에 포함됨으로써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시 GHQ 점령 직후의 상황으로 돌아오면, GHQ는 일본의 모든 핵기술 연구를 금지시켰다. ‘2호연구’를 진행했던 이화학연구소의 사이클로트론도 폐기되었다. GHQ는 원폭에 대한 보도도 금지하고 검열하였는데, 일본 국민들의 반미감정 형성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조약을 통해 일본이 독립할 때까지 이와 같은 정책은 이어졌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일본은 GHQ 점령 종료와 동시에 핵기술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평화를 위한 원자’와 ‘죽음의 재 사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상업용 핵기술 연구 성과를 활발히 공유했다. 일본 정부 측 역시 뉴욕 등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견학했으며, 상업용 핵기술에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일본은 핵기술이 에너지, 의학, 농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도입하려 했으며, 특히 에너지 이용 측면에서 우라늄이 석탄의 300만 배의 에너지를 낼 것이라는 막연하고 과도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업용 핵기술의 세계적인 확산 배경에는 미국의 공산 진영 견제 의도가 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핵기술을 독점하려 했던 미국의 계획은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을 계기로 우방국들에게 핵기술을 전수하고, 자국의 핵우산 아래에 두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53년 12월 8일 UN총회에서 ‘평화를 위한 원자(Atoms for Peace)’ 선언을 발표하며 핵의 ‘평화적’ 이용을 주장하고, 상업용 핵기술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하지만 냉전의 전개 속에서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의 핵무기 개발 경쟁은 멈추지 않았고, 수많은 핵실험이 진행되어 자연계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본은 또다시 핵피폭을 당하게 되었는데, 1954년 3월 1일 미국의 비키니환초에서의 수소폭탄 ‘브라보’ 폭발실험에 일본의 참치 어선 ‘제5후쿠류마루’가 방사능 낙진을 맞은 것이다. 선원 23명 전원이 피폭을 당했고, 6개월 후 선원 한 명이 사망했다. 세 번째 핵 피폭을 경험한 일본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제5후쿠류마루가 포획한 어류들에서 기준치를 초과한 방사능이 검출되자 ‘방사능 참치’라는 단어가 유행했으며, 어류 구매를 기피하는 현상이 생겼다. 이 피폭 사건은 ‘죽음의 재 사건’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일본 시민사회에서 처음으로 반핵운동이 일어났다.
모든 핵무기 사용과 핵전쟁 반대를 주장하던 일본의 반핵운동은 이듬해인 1955년 8월 히로시마에서의 ‘제1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로 이어졌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 피폭 피해자들도 1956년 ‘일본 원수폭 피해자단체 연합회’를 결성하며 반핵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 시기 일본의 반핵운동은 핵무기는 반대했으나 핵을 평화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업용 핵기술 도입에는 찬성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핵무기와 상업용 핵기술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똑같이 위험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으로도 확산되지 않았고, 일본 시민사회도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은 일본의 반핵운동을 염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의 핵 피폭은 모두 미국에 의해 야기된 것이므로 일본 시민사회에서 반미감정이 생기고 나아가 공산주의가 확대될까 두려워했던 것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내건 카드가 일본에 상업용 핵기술을 보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진 미국이 CIA를 통해 접근한 인물이 쇼리키 마츠타로였다.
미국의 공산 진영 견제와 전범 출신 총리 지망생의 공작
쇼리키 마츠타로(이하 쇼리키)는 1885년 출생해 1969년 사망하기까지 메이지유신부터 근대화, 침략전쟁, 태평양전쟁, 패전과 고도경제성장을 경험했다. 이 인물에게 일본이 부여한 수식어가 많다. ‘미디어의 거인’, ‘프로야구의 아버지’, 그리고 ‘원자력의 아버지’까지.
일본제국 시절 경시청 관료였던 쇼리키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흘려 조선인 대학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쇼리키는 1924년 경영난이 심각했던 요미우리신문을 인수하여 언론계에도 손을 뻗쳤다. 요미우리신문은 쇼리키의 합리화 경영, 비용감축 등의 전략을 통해 매출을 대폭 올려 주류 신문사가 될 수 있었다. 쇼리키는 일본 전국에 자사의 TV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니혼테레비방송망 설립구상’과 함께 일본 최초로 야구단을 결성하는 등 새로운 기술과 스포츠 도입을 통해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권력을 확대했다. 사실 쇼리키는 총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러한 행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 패전 이후 GHQ에 A급 전범으로 지목된 쇼리키는 도쿄의 스가모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지만 2년 후 석방되었다. 1922년 도쿄시장에 도전했다가 낙선한 바 있던 쇼리키는 1955년 자신의 지역구인 토야마현에 출마하여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총리의 자리로 가기 위해 쇼리키가 고른 또 다른 수단이 일본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추진. 즉, 상업용 핵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미국이 ‘죽음의 재 사건’으로 인한 일본 시민사회의 반미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계획한 상업용 핵기술 도입에는 언론의 힘을 가진 쇼리키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선전이 필요했다. 이전부터 CIA와 친분을 갖고 있던 쇼리키는 미국의 지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는데, 요미우리신문에는 ‘원자력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요미우리신문의 주최로 핵기술을 선전하는 ‘원자력 평화이용박람회’를 일본 내 20여 개의 도시에서 개최하였다. 해당 박람회는 일본 국민들에게 상업용 핵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핵기술의 상업용 이용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미국의 공산 진영 견제와 정치적 기반이 약하지만, 총리를 지망했던 노년의 신인 정치가인 쇼리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것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有馬哲夫(2008), 『原発・正力・CIA: 機密文書で読む昭和裏面史』, 新潮新書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최종민(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객원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1년 7월(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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