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_ 그들은 왜 상여를 끄는가:
월성핵발전소 최인접지역 주민들의 7년간의 분투 ②
자신들의 장례식과 핵발전소 장례식 치르며 싸운다
월성 이주대책위의 시작:
후쿠시마 사고부터 국내 핵발전소 비리까지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월성핵발전소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김진선 씨는 “지금도 가끔 원자폭탄이, ‘빵빵’ 터지는 것처럼 격납용기에서 소리가 나거든? 압력이 높아지면 낮추려고. 후쿠시마 (사고) 전에는 불꽃놀이 보는 것처럼 옥상 가서 봤어, 막 박수 치면서. 그땐 몰랐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거였는지. 근데 사고가 나고 실시간으로 돔이 터지는 걸 보니까, 아, 우리도 터질 수 있다. 좋은 게 아니구나. 이 동네에서 더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라고 말하였다.
황분희 씨도 “한수원은 깨끗하고, 안전하다 늘 말해왔거든? 우리는 그걸 믿고 살아왔지. 근데 티비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해일이 치는 걸 보는데 뭘 처음 느꼈냐면... 아무리 안전하게 관리해도 핵발전소는 위험한 거구나”라고 말했다. 한수원은 “국내원전은 일본과 다르며, 우리 기술이 더 우수하다”라고 설명했지만, 주민들은 더이상 믿지 않았다.
후쿠시마 사고가 난 이후 많은 언론사가 마을에 방문하여 주민들을 인터뷰한 뒤 핵발전소 위험성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중 한 기자가 황분희 씨에게 지금까지 한수원이 들려준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한수원은 지금까지 중수로는 경수로와 다른 점이 없고, 방사성 물질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거든? 근데 인터뷰가 끝나고 한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중수로는 경수로와 달리 중수를 냉각재로 써서 다른 핵발전소와는 다르고, 큰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액체, 기체상태의 방사성 물질이 매일 나온다고.”
이렇게 후쿠시마 사고는 직·간접적으로 주민들이 지금까지 몰랐던 혹은 은폐됐던 위험들을 알려주었으며 동시에 한수원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2012, 2013년엔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한수원 내부에서 ‘원전 부품 비리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시험성적서가 위조된 부품이 10년간 대량공급되었고, 뇌물수수, 위조, 입찰 담합 등이 확인됐다. 2013년 6월부터 2015년 11월까지 106건의 ‘원전 비리’ 재판 결과, 68명이 실형을 받았고 이들의 형량을 합치면 징역 253년 9개월이며 추징금은 48억 9400만 원에 달한다(중앙일보, 2015. 11. 27, ‘지난해 원전비리 재판, 68명 실형 총 253년9개월 받아’ 기사 참고). 또한, 한수원 직원이 근무시간에 마약을 하는 등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한수원은 핵발전소를 안전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주민들에게 불안과 불신을 자초하였다.
양라윤(2017)은 <원전 주변 지역 주민들의 위험 인식과 대응: 영광원전 주변 지역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주민들은 핵발전소를 위험한 것부터 안전한 것까지 다양하게 인식하지만, 핵발전소 내부에서 직접 일했던 경험이 한수원과 핵발전소를 더 신뢰할 수 있고 안전한 곳이라는 확신을 주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황분희 씨의 경우는 달랐다.
“내가 젊었을 때, 예방정비하는데 들어갔거든. 두 달하면 딴 데보다 돈이 더 많으니까. 원자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사실 방사능에 오염되는지도 모르고 갔어. 한번은 점심시간에 친한 직원이랑 발전소 구경하러 갔는데, 부품 하나하나가 너무 크고 많더라고. 수백만 개가 넘는다는데, 그 부품을 어떻게 다 관리할까, 그땐 참 신기했거든. 근데 짝퉁부품을 썼다고 하니까, 내가 정말 기절할 뻔했어. 국민, 주민의 안전을 생각 안 하고, 돈 적게 쓸라고, 자기들 주머니에 넣으려고 그렇게 한 거 아니야?”라고 힐난했다. 이렇듯 후쿠시마 사고와 연이어 터진 국내 핵발전소 비리를 겪으면서 2014년 8월 24일, 나아리와 나산리 주민 72가구가 ‘월성원전인접지역 주민이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만들었다. 한수원의 안전신화 속에서 살아왔던 주민 중 일부가 이에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포도청:
누가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나
대책위는 초기 30만 원의 가입비와 매달 3만 원의 회비를 통해 활동을 유지했다. 대책위를 만들고 일 년간 매일 최소 오십 명의 주민들이 나왔기 때문에, 한수원 직원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도로 양옆에 서서 피켓을 들었다. 후에는 풍물패를 앞세워 월성 핵발전소 정문까지 상여를 메고 행진도 하였다. 주민들은 한수원이 오히려 “느그가 해봐야 얼마나 가겠나? 1년을 버티겠나”라는 생각으로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말했다. 김진선 씨는 “일 년쯤 해보니까 안된단 말이야. 안 되니까, 이 사람들이 그 점만 생각하고 뒤로 슬슬 빠지더라고. 그때 내가 들어갔거든. 72가구가 시작했는데, 반 정도밖에 없었어”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대책위 인원이 줄어들었지만 오래 싸우기 위해 농성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차가 많이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 많이 노출될 수 있는 초등학교 앞 삼거리가 좋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대책위를 지지하지 않거나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기에, 이들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월성 핵발전소 홍보관 앞 주차장에 농성 천막을 짓기로 했다. 대책위가 농성장을 설치한 이후로 다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나아리에 사는 주민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식당을 운영하거나, 월성 핵발전소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직원으로 일하는 등 한수원과 밀접하게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다. 황분희 씨는 “처음에는 같이 시위했던 사람 중에서 자식이 한수원에 다닌 경우가 좀 있었거든? (한수원 직원이) ‘너그 엄마가 반대한다며?, 너희 아빠도 데모에 나온다며’라는 식으로 말하면, 부모들은 자식이 혹시 잘리거나 내년에 계약연장 못 할까 봐 걱정하는 거지. 그 사람들이 대책위를 못 하겠다는데 어쩌겠어. 우리가 생계를 책임져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며 떠나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상여를 끌기 시작하다:
관 위에 적어놓은 결연한 의지
결국, 대책위가 만들어지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15세대만이 남았다. 이때 대책위는 기존에 하던 피켓시위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싸움을 고민하게 되었다. 처음에 비해 적은 인원으로는 피켓시위를 유지할 수도 없고 상여를 주민들이 멜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남은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담아 싸우기로 했다. 핵발전소 근처에서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관을 끌기로 한 것이다.
대책위는 실제 장례처럼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등의 직함을 관 위에 적었다. 관과 함께 상여를 함께 끌었는데, 그 위에는 핵발전소 돔 모형을 올려놓았다. 대책위는 상여시위를 통해 매일 위험 속에 노출된 자신들의 장례식과 핵발전소의 장례식을 치르며 싸워온 것이다. 이제는 핵발전소를 멈추라고, 여기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계란들의 바위치기’였다. 황분희 씨는 “한수원을 어떻게 이기겠어. 그래도 잘못된 것을 이야기해야지. 계란으로 바위를 수백 번, 수천 번 치면 작은 흠집이라도 낼 수 있는 거 아니야”라며 누군가에게는 ‘무모해 보이고 질 수밖에 없는 싸움’에 임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김우창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에너지정책, 밀양송전탑 갈등, 핵발전소 인근 주민 피해 등에 관심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사업 합의의 의미와 맥락: 합의 주민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전의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 갈등 관리전략으로 인한 이해관계자 변화와 공동체 붕괴」 등이 있다.
탈핵신문 2021년 7월(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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