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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7호>체르노빌,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

체르노빌,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

체르노빌의 봄, 엠마뉘엘 르파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도서출판 길찾기, 20133

정유선(주부)


 

너무 뻔한 책들이 있다. 가령, 우리 아이 그림책 가운데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요같은 책이 그렇다. 물론, 어른들 책 중에도 있다. 한때는 일부러 머리 아프게 그런 책을 찾아 읽고, 그도 모자라 함께 모여 옥신각신, 이러니저러니 세미나를 하고 뒷풀이를 했다. 생각건대, 그것은 강철의 단련과 같은 책 읽기로서, 끊임없는 의식의 각성을 요하는 담금질이었다.

그러다 만난 녹색평론은 얼마나 신선했던가.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 ‘영혼을 입에 담은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이고, 사회과학적이면서 종교적인 영역이 아울러져 있는 듯한, 그 불분명한 자리도 좋았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현실에 고래심줄 같은 신경, 진실을 만나려는 용감한 정신없이는 민감한 마음은 쉽사리 고단해졌다. 이런 이유로, 녹색평론을 읽는 일도 어려워진 지 오래인데, 체르노빌의 봄을 읽었다.

체르노빌을 다룬 책을 보는 사람은, 체르노빌의 참상 혹은 진실을 알거나 의식하고자 그런 책을 본다. 하지만 나처럼 묽은 영혼을 가진 평범한 사람에게 체르노빌의 목소리(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11. 6)같은 책은 무리다. 상상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해야 할 것이므로, 고래심줄 같은 신경으로 버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므로.

체르노빌의 봄은 작가가 기차간에서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는 체르노빌에 관한 책을 만드는 예술가들의 프로젝트에 참가해, 체르노빌의 금지구역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볼로다르카)에서 보름을 지내기로 한 것이다. 반핵활동 말고도 재앙과 직면하고자 하는 마음, 직접 보고 겪고자 하는 마음에서 함께한 것인데, 이 출발선이 독자를 잡아끈다. 사회과학적이거나 전문가들이 분석한 수치들, 재앙의 조각조각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진짜를 보고 싶은 마음에서 작가가 가는 길을 충실히 따라가게 된다. 오래 전부터 나는 방사능이니 방사성 물질, 핵발전을 머릿속에서는 이해했지만 정말은 알 수 없었다. 체르노빌도 그랬다. 작가 임마뉘엘 르파주에게 체르노빌은 결국 하나의 얼굴, ‘비극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것이었다.

그가 본 금지구역은 상상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300명의 거주민이 있는 볼로다르카에서 그는 그곳의 사람들과 자연에서 진정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끔직한 재앙을 그리기 위해왔는데 말이다. 읽는 독자도 끔찍한 재앙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에게서 헤어나올 수가 없다.

사실 책 표지도 죽인다’. 자세히 봐야 비닐로 덮은 신발과 앉을 때 쓸 의자, 마스크가 보인다. 그런 사람을 둘러싼 숲이 참 아름답다. 금지구역이 아닌데도 특별히 더 오염된 매우 더러운곳을 그린 것이다.

그곳을 증명하는 방법은 과학적 수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

모순에 빠진 작가는 자기 앞에 펼쳐진 풍경과 자신이 그린 그림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나도 깜짝 놀라 체르노빌의 진실은 무엇인지 스스로 묻는다. 여느 체르노빌 관련 책들이 주지 못한 질문이고,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볼 것을 요구한다. 체르노빌과의 공존, 핵과의 공존이라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가가 진실을 묻고, 왜 체르노빌에 왔는지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체르노빌을 그려야 할지를 고민하듯이.

이 책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즐거움을 주면서, 그 아름다움으로 진실이란 무엇이냐고 묻는다. 참 좋은 책이다. 추상적인 비극으로 얼버무려져 있던 체르노빌, 작가는 날 감동시킨 건 바로 삶이었다는 마지막 말처럼 우리에게 낯선 삶을 아무 편견 없이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발행일 : 201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