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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7호>체르노빌로부터의 경고, 첫번째

체르노빌로부터의 경고

아사노 겐이치 교수(浅野 健一, (일본) 동지사同志社대학 사회학부)

번역 : 이영구


일본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에 활용하려고 체르노빌 시찰관광 (NPO법인 식품과 생활의 안전기금주최)에 참가한 필자가 2회에 걸쳐 실정을 보고한다. 이번 1회에서는 핵발전소를 해체하고 있는 현장에서(출처, 일본 주간 금요일(週刊 金曜日)2012112, 918. 저자에게 허락받고, 탈핵신문 4~5월호 2차례에 걸쳐 전제한다 편집자주).

지금도 폐로 작업에 7천명 이상 투입

사상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는 1986426일 오전 123분 구 소련 우크라이나(1991년 독립)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4호기에서 일어났다. 소련의 발표만으로도 33명이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 중 기술자 한 사람은 낙하물에 깔려서 지금도 시신을 수습 못하고 있다. 핵발전소에서 30km권내는 출입금지되고 약 200개의 마을에서 약 13만명이 강제 이주당했다.

현재도 핵발전소에서는 운전원 3,100명이 폐로작업을 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본을 포함해 선진국에서 55천만 유로(7,843억원, 20133월말 환율기준)의 지원을 받고 노후화된 석관을 새로 만들고 2015년 완성을 향해 새 셀터를 건설중이다. 30km권내에서는 약 4천명의 관계자들이 쓰레기 처리 작업을 하고 있고, 합계 7천명이 일하고 있다.

지금도 원자로 가까이에는 갈 수 없다

927,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북쪽에 있는 체르노빌 핵발전소에 버스로 향했다.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지나서 핵발전소에서 30km 지점의 검문소에 도착했다. 군대와 경찰이 경비하고 있는데, 안내원 바시리나 씨(21)r 전원의 패스포트를 모아서 계원(係員)이 한 사람씩 확인·체크를 끝내고 다시 또 간다.

인적이 없는 풍경이 계속된다. 10km 지점에도 검문소가 있다. 사고 당시 건설 중이었든 5~6호기의 냉각수 탱크와 공사가 중단돼 방치된 상태 2대로의 크레인이 보인다. 옆으로 길게 있는 핵발전소(1~4호기) 건물이 보였다. 여행참가자가 가지고 온 선량계(線量計)가 삐~삐하고 울리기 시작했다.

2호기도 4호기 사고영향을 받아 모든 전원을 상실하고 제어반(制御盤) 전부의 빨간램프가 점등, 위기에 처했으나 폭발을 면했다. 그 후 91년에 일어난 터빈실 화재로 원자로가 정지, 현재는 건물 안에서 터빈의 해체·철거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원과 똑같은 백의(白衣) 백모 구두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을 마친 작업원과 몇 차례 지나쳤다. 젊은 작업원과 여성도 있다. 직원은 우측에 원자로가 있고, 좌측에 터빈실이 있다. 원전은 지금 운전을 멈추었다고 설명. 우측 유리창에 남성 작업원 하나가 원자로 옆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복도를 몇 백미터 걸어서 제어실로 들어가니 좌측에 운전원의 책상이 있다. 5인 시프트(근무, 근무조)라고 한다.

78년부터 이곳에서 일하는 기술책임자 알렉산더 보리슈 씨(56)원자로 제어작업 일은 하지 않고, 이제부터 몇십년 동안 냉각작업을 해야 합니다. 냉각풀(냉각저장조)의 수위와 온도를 컨터롤하는 것이 일입니다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는 심장관계에 이상이 있어, ‘88년에 한달간 입원. 신경계 검사를 받고, 여러 가지 증상을 들었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전에는 1년에 네 번 정밀검사를 했으나 지금은 1년에 한번이라고 한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해 이것은 또 하나의 체르노빌이 된다고 생각했다. 정보가 적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언론정보로 부터의 분석이지만 전력공급이 되고 있었다면 이른 단계에서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월에 문을 연 핵발전사고자료실에서서 홍보담당자는 원자로에는 지금도 가까이 갈 수 없고, 4호기 안에 있는 1700본 이상의 연료봉을 하나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 30~50년 이상 걸린다. 우라늄용액의 산화물과 방사성 폐기물 등도 대량 남아있다. 새 셸터(shelter, 방호벽)100년후에는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명했다.

원전건물 부근의 공간선량은 굉장하다. 선량계는 복도의 창가에서 2.94, 제어실안에서 1.25마이크로시버트(시간당)를 나타내고 있다. 자료실내는 0.5, 4호기의 석관 앞 견학장소에서는 15.45마이크로시버트(시간당)를 기록하고 있다.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 교토대학 원자로실험소 조교는 측정된 선량은 급성사망할 수 있는 선량율은 아니다. 단지 일본 법령에서는 0.6마이크로시버트(시간당) 이상은 방사선 관리구역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작년 315일 결사적 각오로 후쿠시마현 아이마시(相馬市) 등에 들어간 경험을 가진 생활클럽후쿠시마의 쓰찌야 마유시(土山雄司) 씨가 선량계를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높은 선량의 방사능을 쏘인 것은 도쿄전력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래 1년반 만이라고. 체르노빌은 사고 후 26년만 반이 지났는데도 15마이크로시버트(시간당) 이상이다. 후쿠시마에 돌아가는 것은 영원히 계속되는 전장(戰場)’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통감했다.”

죽음이냐 감옥이냐

체르노빌 핵발전소를 방문한 전날, 키예프에서 우크라이나·체르노빌연맹 대표 유리 안드레이예프 씨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연맹은 핵발전소사고 처리에 종사한 사람들의 조직이고, 안드레이에프 씨는 2호기에서 긴급처리를 한 기술자이다. 앞의 나온 보리슈 씨의 동료이기도 하다. 뇌졸증을 앓고 몇차례나 생사의 경계에서 살아났다. 안드레이예프 씨는 당시를 회고한다. “사고가 난 밤은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폭발음은 듣지 못했다. 26일 오전 9시경 아내가 시장에서 돌아와 핵발전소가 폭발해 몇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핵발전소에서 폭발은 있을 수 없다고 했더니, 아내는 그렇다면 딸내미를 데리고 밖에 산책하고 오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2살 반된 딸을 데리고 핵발전소가 보이는 데까지 가서 딸아이를 피폭시켰다.”

그 후 직장에 가니 원자로의 단면이 70도 기울고, 뚜껑도 벗겨져서 방사능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가족이 걱정되어 무서워졌으나, 나와 같은 전문가는 대체인력이 없다. 죽음이냐 도망쳐서 감옥에 가느냐의 선택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한 그는 2호기의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제어반은 150개소 동시에 비상사태를 나타내는 램프가 점등했다. 정전으로 캄캄한 데 경보음도 울리고 정말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는 사고의 규모를 숨기고 있다. 구 소비에트와는 달리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인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비판했다. 또 동연맹이 사고 다음날 키에프의 일본대사관에 사고처리의 지원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사고를 최초로 하늘에서 촬영한 마카렌코 기자에게서 듣는다

소련(당시) 정부는 사고가 난 후 일주일 이후, 외국인을 포함해 내·외 저널리스트 수백명을 사고 현장에 들어가게했다. 그 해에만 다큐멘터리 영화 수십편이 만들어졌다.

사고현장을 촬영한 바실리 마카렌코 씨(당시 우크라이나TV)사고 직후는 정보가 봉쇄되고 지상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것도 금지되어, 공중·하늘에서 취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징병(徵兵) 때 있었던 공군의 친구한테 부탁해서 헬리콥터에 타고 512일 오전 6시에 핵발전소 꼭대기에서 촬영했다. ·정부 중앙이 배신을 거부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핵발전소 사고의 비참함을 처음 전달한 이 촬영영상은 현재도 TV와 다큐멘터리에서 사용되고 있다.

소련국가보안위원회(KGB)가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이고, 사고에 관한 정보도 모두 통제하고 있어서, 참 잘 촬영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촬영한 비디오가 많이 있어서 디지털화하고 싶다고 한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같은 보트에 타고 있다. 지구안에 있는 형제들이다라고 말했다.

 

발행일 : 201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