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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을 돌아본다

기획 :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 돌아보기 

         2019 한국원자력연구원 상황 살펴보기


설립 60주년을 맞은 한국원자력연구원이 '홀대'받고 있다는 찬핵 진영의 공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탈핵신문은 그동안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지나온 역사와 현재 시점을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 편집자 주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 돌아보기 

농업·의료용, 핵무기개발, 핵발전 진흥

시대마다 달랐던 우리나라의 핵에너지 연구


리나라 정부에 핵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한 부서가 처음 생긴 것이 1956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던 일본이 원자력기본법을 제정한 것이 1955년의 일이니 우리나라 핵에너지 연구 역사는 매우 빨리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해외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였다. 1953년 1인당 국민총소득은 67달러에 불과했고, 국민소득에서 미국과 유엔의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핵에너지 이용은 ‘사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1959년 3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현 서울 공릉동) 서울공대 5호관에서 열린 원자력연구소 개소식 모습

사진 출처 :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진으로 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그런데도 핵에너지 이용 진흥을 추진했던 것은 남북 대치 국면에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문교부 원자력 과장의 일화는 이런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미국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이라는 명분으로 핵에너지의 비군사적 이용에 대해서는 장려했으나, 군사적 이용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다. 미국의 원조가 절대적이었고, 특히 핵에너지 연구는 미국의 협조 없이 불가능했다.


군사용 핵무기 기대 접고

방사선의학연구실 설치

방사선농학연구소 설치


자연히 원자력연구소의 초기 역할에서 의료와 농업 분야가 클 수밖에 없었다. 방사선의학연구실이 원자력연구소에 설치된 것이 1962년의 일이다. 방사선을 이용한 진단과 치료방법 연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방사선의학연구실은 이후 방사선의학연구소로 분리되어 현재 한국원자력의학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사선을 이용한 농학 연구 역시 당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품종 개량, 토양 및 비료 개선 연구 등을 진행하는 방사선 농학연구실이 1965년 원자력연구소에 설치되었다. 방사선 농학연구실 역시 이후 방사선농학연구소로 분리되었으나, 이후 정부의 1972년 연구소 민영화 계획 추진에 따라 일부는 다시 원자력연구소로 돌아오고, 일부는 농업진흥청으로 흡수되었다.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수립한 것은 1965년 ‘장기에너지 수급과 원자력발전계획’을 통해서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1970~1974년까지 600메가와트급 부지를 선정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에 따라 현재 고리 1호기 부지가 선정되었고, 원자력연구소는 이를 검토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핵발전소를 설계·건설할 역량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입을 위한 기술 검토가 원자력연구소의 주요 업무였다.


1965년 핵발전소 건설 계획 수립

핵재처리시설 건설계획 미국이 반대


1959년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에서 열린 연구용 원자로 1호기 기공식에서 시삽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진으로 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핵발전소 도입과 함께 핵무기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핵재처리 시설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계획도 한편에서 추진되었다. 1968년 수립된 ‘원자력의 연구·개발·이용을 위한 장기 계획’에는 핵재처리 시설 건설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1971년에는 원자력연구소가 온산공단 인근에 핵재처리 시설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서를 원자력청에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프랑스나 캐나다와의 협상을 통해 우회경로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이 역시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했다. 자칫하면 미국의 차관으로 건설되고 있던 고리 2호기 건설이 어려워지는 국면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결국 1976년 정부는 재처리시설 도입을 위한 재원이 없으며, 계획도 무기한 보류되었다는 발표를 하면서 핵재처리 계획은 무산되었다.

실제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향이 있었는지 혹은 외교적 카드로 사용한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를 검토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철회시키거나 축소하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핵무기개발을 추진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긴 하다. 핵재처리 시설 도입이 포기된 이후 원자력연구소의 역량은 핵발전소 국산화 계획 추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핵무기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감시와 의심은 계속되었다.


전두환, 미국 지지 얻기 위해

원자력연구소 해체 지시도


1981년 1월 12일 한국에너지연구소 현판식 장면 / 사진 출처 : 한국원자력연구원 <사진으로 보는 한국원자력연구원 60년사>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더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처음엔 원자력연구소 해체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핵무기개발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줄 강력한 카드가 필요했던 것이다. 연구소 내부의 반발이 커지고, 당시 과학기술처는 예산 배정을 중단하는 등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대립이 몇 개월 동안 이어졌다. 결국 1980년 원자력연구소는 명칭에서 ‘원자력’을 삭제하고, 핵연료개발공단, 태양에너지연구소 등과 통합하여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재편되었다. 1977년 과학기술처 예산의 34%나 차지하던 원자력연구소 예산은 1981년 19%로 급감했다. 한국에너지연구소가 다시 원자력연구소로 개편된 것은 전두환 정권이 끝난 1989년의 일이었다.

올해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설립된 지 60년이 되는 해이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그간 핵발전에 대한 연구 성과가 일시에 무너지고 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하지만 한국원자력연구원이 처음부터 핵발전을 연구했던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핵발전 이외에 안전이나 폐로, 폐기물 처분 등 다른 연구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연구역량과 국내외 상황에 따라 목표와 과제가 수정되고 그때마다 부침을 겪었던 것이다. 



∥2019 한국원자력연구원 상황

문재인 정부, 원자력연구원 개혁 포기


박원석 신임 연구원장

더 적극적인 진흥정책


소형원자로 기술 확보

핵연료 처리 연구 계획


얼마 전 박원석 한국원자력연구원 신임 원장은 취임식에서 “에너지전환시대 원자력기반 융합 연구로 종합 연구원으로 재탄생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구상에 따르면, 향후 원자력연구원의 임무로 ‘종합적 원자력 연구·개발로 학술의 진보, 에너지 확보 및 원자력의 이용을 촉진’을 잡고 있다. 이 임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원자력안전 분야 기술 개발 △사용후핵연료 처리·처분 실증기술 확보 △소형원자로 기술 확보 △방사선기술개발을 잡고 있다. 박원장은 원자력연구원에서 소듐냉각고속로 개발사업단 단장과 원자로개발연구소장 직무대행을 역임했다. 그간 자신의 역할이 ‘연구로 개발’이었기에 원장에 취임한 이후 원자력연구원 비전으로 ‘연구로 종합연구원’이나 ‘원자력 이용 촉진’을 선포한 것은 예상된 일이기도 하다. 더구나 올해는 원자력연구원 설립 60주년을 맞은 해이기 때문에 이번 비전 선포가 핵에너지 연구개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원자력계와 보수 언론은 원자력연구원 60주년 행사에서 원자력계 인사들이 ‘모욕’을 느꼈다고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원자력연구원의 임무와 역할은 과거보다 더 적극적인 ‘진흥 정책’으로 짜여 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 ‘2019년도 원자력 융복합 기술개발 사업 신규 과제 공고’를 통해 핵추진 쇄빙선용 원자로 해상부유식 핵발전소, 소형 원자로 연구개발 계획을 받기로 했다. 이들 연구는 올해부터 2022년 말까지 4년간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과기부는 ‘스마트 원자로 건설 및 수출촉진 고위급 TF’를 구성하여 과기부 차관이 직접 소형원자로 문제를 챙기고 있다.


과기부, 원자력 융복합 기술개발

스마트 원자로 건설 및

원자로 수출 촉진 TF팀 구성


최근 몇 년간 원자력연구원은 핵폐기물 불법 투기, 절취 등 비리사건이 드러나고, 화재사고가 이어지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다. 핵폐기물 검사 등 가장 기본적인 업무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핵폐기물 처분이 중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동안 높은 담장에 가로막혀 있던 원자력연구원의 민낯이 하나둘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원자력안전위원회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어느 곳도 속 시원한 개혁방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원자력연구원 스스로도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문제점을 해결하기 보다는 ‘방귀 뀐 놈이 성내는 상황’을 만들면서 과거에 없던 연구과제가 채택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은 원자력연구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원자력계의 뿌리는 깊다. 과기부보다 원자력원이 먼저 설립되었고, 한때 과기부 예산 중 원자력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이를 때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원자력계, 특히 원자력연구원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연구 집단보다 장관 배출이 많았고, 학계와 산업계, 정계와 언론계 등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자력연구원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원자력연구원 개혁 못하면

에너지정책 변화 요원한 일


하지만 이를 손대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 변화는 요원한 일이다. 경제성이 떨어져 십 수년째 수출 전망만 발표하고 있는 소형 원자로나 빙산도 없는 나라에서 핵추진 쇄빙선 계획이 나오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산업부에서는 탈핵·탈석탄·에너지전환을 위해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지만, 원자력연구원은 ‘에너지전환 시대에 맞춰 원자로 연구’를 하겠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청와대는 원자력연구원 개혁은 고사하고 국정 과제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이래저래 개탄스럽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탈핵신문 2019년 5월호(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