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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3호>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67주년, 마루키미술관, 김형률, 한국원폭2세환우”

히로시마나가사끼 핵폭탄 투하 67주년을 맞아

"마루키미술관, 김형률, 한국원폭2세환우

박일헌(독립다큐 감독)

 

 

마루키미술관을 알게 된 것은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가 쓴 글에서였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가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12728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평화의나무' 합창단, 일본 '우타고에' 합창단, 재일조선인 합창단 '얼싸'의 합동공연이 사이타마에서 열렸다. 1967년 개관한 마루키(丸木)미술관은 사이타마 현에 있었고, 아내는 '평화의나무' 합창단원이었다. 2012729일 숙소에서 아침 일찍 나섰다.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고 지하철을 탔다. 1시간 반 정도 걸려 츠끼노와(つきのわ)역에 도착했다. 미술관까지 가는 내내 쉴 새 없이 땀이 흘렀다. 더위 때문인지 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67년 전 핵폭탄이 터진 그날도 더웠을 것이다. 약도에는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초행길인지라 5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입장료를 내고 미술관에 들어섰다. 안내하는 남자분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미술관은 냉방을 하지 않아서 덥다고, 손을 가리킨 곳을 보니 부채가 있었다(편집자 주 ― 핵폭탄과 핵발전에 반대해 핵발전 해당분의 전기요금을 납부하지 않겠다고 도쿄전력에 통지하고, 전기요금의 일부를 납부하지 않자 도쿄전력은 요금미납으로 송전을 정지시켰다. 발전기로 자가발전해 전기를 공급한 일도 있다). 부채를 들고 2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먹으로 그린 대형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숨이 멎는다. 히로시마 출신인 마루키 이리(丸木位里, 1901~1995년)와 마루키 도시(丸木俊, 1912~2000년) 부부는 원폭의 참상을 대형 그림으로 그렸다. 그것이 히로시마 연작 <원폭도(原爆圖)>. 내가 보고자 했던 그림은 히로시마 연작 중 14부인 <까마귀>란 작품이었다(위 그림 참조). 2층의 전시실에는 할머니 두 분, 아이들과 함께 온 4명의 가족이 함께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숨이 자꾸만 가빠왔다. 단지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계단을 통해 1층 전시실로 내려갔다. 1층 전시실 첫 번째 방에서 나는 까마귀(1972년, 1.8m×7.2m)를 만났다. 그림 아래에는 일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림을 소개하는 내용이 있었다(아래 참조).

 

 

 

울었다. 울었다. 엉엉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마음을 추스리려고 전시실 가운데에 있는 넓은 평상 같은 의자에 앉았다. 길게 숨을 쉬었다. 마음을 다스리고 싶었다. 주책이다 싶었다. 다시 눈물이 났다. 또 울었다. 한참을

2004년 김형률을 만났다. 자신을 원폭2세라고 소개했다.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은 평생 질병에 시달린다고 했다. 김형률의 병명은 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었다. 2002322일 김형률은 자신이 원폭2세로 원폭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김형률은 부모님의 고향인 경남 합천에서 자신과 같은 아픈 2세들을 만났다. 그리고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만들었다. 김형률은 한여름에도 두터운 잠바를 입고 다녀야 했다. 한번 터진 기침은 30, 1시간, 피를 토할때까지 계속 되었다. ‘환우회활동과 병원 생활이 반복되는 시간들이었다. 2005529일 부산 수정동 자신의 방에서 김형률은 36세로 눈을 감았다. 생전의 김형률을 만났던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의 깡마른 몸을, 쉼없이 이야기 하던 모습을, 그리고 그가 메고 다닌 배낭을. 김형률은 각종 자료와 책이 가득한 배낭을 메고 다녔다. 김형률은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마지막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로 끝을 맺었다. 김형률이 뿌린 씨앗은 지금 한국원폭2세환우회와 함께 조금씩 조금씩 새싹을 키우고 있다. 아픈 환우들의 치료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김형률의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67년 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죽어간 식민지 조선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전쟁범죄를 증언한다. 원폭후유증으로 인한 질병에 시달리는 한국원폭2세환우들은 일본의 거짓 평화를 증언한다. 그리고 후쿠시마 이후 한국원폭2세환우들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증언한다. 지금 당장 원자력발전소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국원폭2세환우들이 살아 온 시간들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진설명: 원폭도제5부 소년소녀 1951의 한장면. 그림 박일헌 제공>

사회적 차별과 질병 속에서 가난의 대물림을 받은 것이 한국원폭2세환우들이다. 유전적 질병은 비단 2세에서 그치지 않는다. 3, 4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슬프고 가슴 아프지만 한국원폭2세환우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하자. 그러기위해서는 지난 날 우리 사회가 무관심 속에 방치했던 한국원폭2세환우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사죄의 시작은 한국원폭2세환우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여야 할 것이다. 더불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전쟁책임을 부정하고, 역사를 왜곡하여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당사자이면서도 마치 전쟁 피해자인양 행세하는 일본에게 영원히 벗을 수 없는 멍에를 지우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고층 건물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에서 보는 미쓰비시 상표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역사를 망각하는 지를 보여준다. 역사의 망각을 넘어 후쿠시마 이후 핵발전에 대한 일말의 변화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한국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절망을 느낀다. 대한민국은 까마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눈알은 우리 아이들의 눈알일 것이다.

발행일 : 2012.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