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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창간호> 완공한 핵발전소를 폐기한 나라들

완공한 핵발전소를 폐기한 나라들
투자비를 아까워하기보다는 국민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이미 들어간 돈은 어쩔 수 없다?

정부의 무분별한 토목공사는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다. 그리고 일단 공사가 시작되고 나면, 문제점이 드러나도 건설계획이나 공사는 중단되지 않는다.

소위 ‘매몰비용 효과’ 때문이다. 의사결정 후 이것을 실행한 경우, 이미 투자한 시간과 비용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규모가 큰 사업일수록 많이 나타나는데, 1기 건설에 3조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핵발전소의 경우, 그 어떤 사업보다 매몰비용 효과가 많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해외 각국의 사례는 이 매몰비용보다 국민의 안전과 의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민중의 힘으로 막아낸 필리핀 바탄핵발전소

1985년 6월 18일. 필리핀의 바탄지역주민 수천명이 바탄핵발전소(BNPP)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 여기까지는 전세계 어디서나 한번쯤 봤을 만한 장면이다. 그러나 바탄 지역주민들은 이후 3일동안 총파업을 벌인다. 상가는 물론 인근지역의 농부, 노동자들이 모두 일을 멈추고 바탄핵발전소 반대운동을 벌인 것이다.

1980년대 우리나라의 반핵운동 역시 단지 핵발전소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맞물렸던 것처럼 필리핀도 마찬가지였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1973년부터 진행된 핵발전소 건설은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로 일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계속 추진되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자 더욱 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5년 바탄지역의 총파업은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큰 분기점이 되었다. 이미 발전소는 거의 완성된 상태였고, 그때까지 투입된 금액만 23억달러에 달했다. 총파업 이후 바탄핵발전소 반대운동은 더욱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결국 1986년 2월 필리핀 민중혁명으로 마르코스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자, 핵발전소 건설은 중단된다. 활성단층이 많은 지역이라는 근본 이유와 더불어 정권의 붕괴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이어 발생한 체르노빌 핵사고가 바탄핵발전소를 영영 문닫게 했다.

국민투표로 승리한 오스트리아 츠벤텐도르프 핵발전소

이보다 먼저 핵발전소를 폐쇄한 사례도 있다. IAEA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 핵무기, 핵발전 등 다양한 핵정책을 논의하는 IAEA 본부가 있지만, 정작 오스트리아에는 핵발전소가 하나도 없다. 현재 오스트리아는 법으로 핵발전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역시 핵발전소를 건설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1978년 완공된, 비엔나에서 약 30km 정도 떨어진 츠벤텐도르프핵발전소다. 이 핵발전소는 70만kW급으로 같은 시기에 완공된 우리나라의 고리핵발전소 보다 약간 큰 규모이다.

하지만 핵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는 어느 때보다 컸고, 무엇보다 안전성에 대한 우려가 무엇보다 컸다. 결국 1978년 11월 핵발전소 가동 여부를 둘러싼 국민투표가 진행되어 50.47%의 근소한 차로 폐쇄가 결정되었다. 표수로는 약 2만표(0.9%) 차이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선택은 분명한 반대였고, 이 결정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때까지 투입된 금액은 140억 오스트리아 실링. 현재 금액으로 약 10억 유로(약 1조 4600억원)였다.

핵발전소 당국은 주민투표 이후에도 재가동에 대비해서 설비를 유지보수하는 등 각종 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민투표 이후 발생한 1979년 스리마일 핵사고와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는 이러한 기회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완공을 앞둔 핵발전소 5기를 정지시킨 스페인

스페인의 경우는 더욱 복잡하고 극적이다. 스페인의 민족주의 분리조직 ETA(Euskadi Ta Askatasuna, 바스크 조국과 자유)에 의해 주도된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매우 격렬히 진행되었다. 바스크 지역에 건설되고 있던 레모니즈핵발전소 1,2호기를 둘러싼 ETA와 스페인 정부간의 충돌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1979년 6월, 한 반핵운동가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핵발전소 폐쇄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미 미국 스리마일 핵사고 이후였기에 핵발전소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진 상태에서 벌어진 이 사고 이후 반핵운동은 더욱 격렬해져 급기야 1981년 2월에는 핵발전소 수석엔지니어가 납치 살해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출범한 사회당 정권은 전력수요 둔화를 이유로 1983년 국가에너지계획(PEN)을 통해 당시 건설·계획 중인 핵발전소 10기중 5기의 건설을 중단하는 계획을 발표한다. 레모니즈 1,2호기는 92%의 완성상태, 발데카벨레로스 1,2호기는 각각 60%와 70%의 건설 완성도를 보였지만, 바스크 분리주의자들과 일반 국민들의 반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핵발전소 건설 중단, 문제는 돈이 아니다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문제가 많더라도 핵발전소를 완공해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옹색하다. 문제가 있다면 그때라도 중단하는 것이 합리적일뿐더러, 더 경제적일 수 있다. 이는 후쿠시마, 체르노빌 등 거대 핵사고를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미 만들어졌으니 어쩔 수 없다’ 혹은 ‘국책사업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이미 투자된 매몰비용이 아까울 수 있으나, 소탐대실을 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완성된 핵발전소를 과감하게 버린 해외 각국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