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현(경북대학교 행정학부)
2016년 여름 대한민국은 폭염으로 몸살을 앓았다. 덕분에 전기요금 폭탄의 주범이라고 지목된 누진제를 철폐해야 한다며, 정치권까지 가세했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누진제 개편은 산업부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항인데, 정부가 오히려 수구세력으로 몰리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 필자도 언론의 왜곡성 보도에 피해를 입으며, 곤혹을 치렀을 정도였다.
필자는 문제 많은 누진제의 절대적인 유지론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최근에 소송으로 번진 무조건적인 폐지에도 반대한다. 물론 합리적인 개선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기존의 누진제를 개선할 때에는 처음 제도가 설립될 당시의 취지를 검토하고, 그 동안의 변화된 상황을 고려한 뒤, 미래의 정책적 방향에 맞게 개편해야 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를 판단해서 정책을 개선하려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국정운영의 ‘철학’이다. 예를 들면, 에너지정책, 기후변화정책, 전력정책 등에 대한 관점과 입장을 정리한 뒤, 이러한 기조 하에서 누진제의 단계와 요율이 정리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철학적 고민과 방향이 정리되지 않은 채 이뤄지는 임시방편적인 개선은 오히려 개악을 일으킬 수 있다.
실제로 산업부는 지난 8월 11일 당정 협의를 거쳐 여름철 한시적으로 누진제 구간의 완화를 통해서 전기요금 부담을 줄여주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역시나 철학과 관점 없이 여론에 떠밀려서, 대통령의 말 한 마디에 땜질하듯이 넘어가고만 것이다. 정책에 대한 철학의 부재가 가져온 대한민국 국정운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일 수 있다. 결국 정부 발표 이후로도 국민들의 불만과 원성은 잦아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폭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누진제 논란에서 탈핵 진영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국민들의 불만을 떠받들고 있는 인식의 기저에 전기요금이 저렴해야 한다는 욕구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기는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와 달리 이들을 전환해서 만드는 2차 에너지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당한 폐열이 손실되기 때문에 전기는 기본적으로 값비싼 에너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컴퓨터, 세탁기, 핸드폰, 전기차, 에어컨 등의 다양한 용도를 생각하면 대단히 편리한 고급 에너지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비싸야하지 않을까?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탈핵 진영은 전기요금이 오히려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먼저 후쿠시마사고로 입증된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설비와 장치들이 추가되어져야 하고, 이는 전기요금의 인상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도 세계 각국에서 그렇게 되고 있다. 안전한 핵발전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탈핵 진영은 핵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렇다면 핵발전이 아닌 태양광, 풍력, 천연가스 같은 에너지로 대체해나가야 한다. 최근 신재생에너지의 가격이 빠른 속도로 하락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전기요금 인상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제 여름 한철 더위도 물러가고 9월 들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누진제 논란의 열기도 식어버릴 것이다. 최근에 정부가 전기요금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기는 했지만, 올해 겨울에나 발표될 예정인 결과물은 지금에 비해 주목받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내년 여름이 되면 전기요금 폭탄을 거론하며, 또 다시 누진제 논란이 벌어질 것이다. 이때 정부는 대선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또 다시 임시방편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 정책에 대한 철학을 갖고 있지 못한 정부 하에서 쳇바퀴 돌듯이 진행되는 악순환일 것이다.
이때 탈핵 진영은 ‘값 싼 전기’라는 환상과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 편리하고 유용한 고급 에너지인 전기를 안전하게 이용하려면, 그리고 핵발전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충분히 지불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조금 비싼 태양광 패널을 내 집 지붕에 설치하려는 각오가 되어져있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비싼 전기를 아껴 쓰려는 인식과 생활양식이 자리잡아야 한다. 물론 국가 전체의 시스템과 도시 구조를 에너지 저소비 형태로 바뀌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이번 누진제 논란에서 가장 전면에 나섰던 세력은 정치권과 언론이었다. 반면에 환경단체와 탈핵 진영은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움이 있다. 정당한 내용의 성명서가 뒤늦게 몇 차례 발표되기는 했지만, 여론을 전환하지는 못했고 끌려가기만 했었다. 국민들의 불만과 짜증이 정치 및 언론과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정책에 대한 철학이 없었던 국정운영의 결과는 우는 아기 달래주는 듯 한 한시적 완화였을 뿐이었다.
탈핵 진영이 꿈꾸는 ‘핵 없는 세상’을 달성하려면,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국민들과 공유해야만 한다. 이때 충돌되는 부분이 바로 ‘값 싼 전기’라는 국민들의 환상이다. 독일 국민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일본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비싼 전기요금을 한국 국민들이 공감하게 만드는 작업이 탈핵진영의 숙제일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이겠지만, 한국의 장점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학습하고 빠르게 변한다는 부분 아닐까? 내년 대선에서는 누진제와 탈핵을 포함한 에너지 정책의 철학적 논쟁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탈핵신문 2016년 9월호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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