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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핵 피해자인 김형률을 아시나요?

이곡지 어머님의 안타까운 증언
“제가 6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되었어요…”
‘한국원폭2세환우회’의 초대회장이었던 고 김형률의 어머님 이곡지 님이, 제주 강정평화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영화인 ‘귀향’을 관람하고 나오며 청년들에게 갑작스런 증언을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보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인 원폭피해자문제를, 당신의 이야기를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되는 이곡지 어머님의 증언을 잠시 쉬는 시간에 어찌 다 전하겠는가. 청년들에게 다음을 기약하고 우선 헤어졌다.


몇 년 전부터 제주를 가고 싶다고 해, 고 김형률의 부모님을 모시고 지난 4월 21일 제주로 평화나들이를 떠났다. 마침 4월 23일부터 제1회 ‘강정국제평화영화제’가 열리기에 그 일정에 맞췄다. 그 첫 작품으로 ‘귀향’이 상영된 것이다.


이곡지 어머님은 6세에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했고,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와 피부병, 등허리 종양 등의 원폭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 김봉대 아버님과 결혼해 3남 2녀의 자녀를 가졌고, 그 중 막내아들인 고 김형률은 어릴 때부터 병원과 집을 오고가며 투병생활을 하며 활동하다 2005년 희귀성 난치질환인 선천성면역글로블린 결핍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물림되는 원폭피해
“저는 올해 32살의 남자입니다. 6년 전인 1995년에 부산의 종합병원인 침례병원에서 면역글로블린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글로블린결핍증(lummunoglobulin deficiency with incresed lgM)이란 희귀병을 진단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주 감기에 걸리고 그로 인해 20살 때부터 기관지확장증이 생겨 폐렴도 자주 걸려 입원도 대여섯 차례 했습니다(그 당시 병원에서 이런 희귀병이 생긴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은, 저의 어머님이 원폭피해자이셨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했습니다). 지난 5월달에도 일을 하다가 갑자기 가슴통증이 심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특수 피검사를 한 결과 6년전이나 지금이나 면역체계는 똑같은 결과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관지와 폐에 CT촬영을 했는데, 6년 전보다 좋은 상태는 아니라고 합니다.”


고 김형률이 32세 때, 그의 이런 호소에 응답한 이들과 함께 2002년 대구에서 첫 기자회견을 해 세상에 자신이 원폭2세 피해자임을 밝히고 2,300여명의 2세들을 위해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결성, 2003년에는 시민단체들과 함께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다.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2005년에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기관 최초로 원폭1세와 2세의 실태조사결과를 발표했고, 조사결과 원폭피해자 1세와 2세 모두 일반인들에 비해 질병발생 위험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시민단체들과 함께 ‘한국인 원자폭탄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토론회와 일본 도쿄의 심포지엄에 참여했다가 2005년 5월 29일, 오전 9시경 부산 자택에서 끝내 숨져, 남은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남겼다.


자신의 병이 단순히 개인의 아픔이 아닌 전쟁과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역설하고 핵의 야만을 고발했으며, 동시에 원폭2세 환우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한 반핵평화인권운동가였던 고 김형률. 전태일처럼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그를 어찌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계로 이어지는 핵 피해자의 대연
작년 2015년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70주년으로, 대표적인 핵 피해지역인 히로시마에서 11월 21일~23일 3일간 ‘세계핵피해자포럼’이 열렸다. 나는 한국대표단을 꾸려 히로시마로 갔고, 다양한 세계의 핵 피해자들과 활동가들을 만났다.


이번 세계핵피해자포럼에서는 약 10개국 900여 명에 이르는 관계자들이 참가하여 핵폭탄, 핵실험, 핵발전소사고, 핵산업 등에 의한 피해 실태를 보고했으며, 방사능 피해에 대한 최근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특히 23일 마지막 날에는, 히로시마 선언을 채택하여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중국인, 대만인, 연합국 포로 등도 희생됐다는 사실 등을 확인하고, 핵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누구나 핵에 노출되지 않을(혹은 최소한으로 노출될)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세계핵피해자포럼에서 한국대표단과 히로시마 피폭2세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공=강제숙

 

2016년 올해는 체르노빌 사고 30주년이다. 세계핵피해자포럼에서 지난 2012년 합천비핵평화대회에 참가했던 체르노빌 피폭자인 파벨 브도비첸코의 아들인 체르노빌 피폭자 2세도 만나 반가운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지금도 후세들은 대물림의 고통을 받으며,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방사성 물질이 남아 있어, 우리의 핵발전소 문제처럼 현재진행형이다.

 

남겨진 과제인 특별법
고 김형률의 노력으로 2005년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애썼던 특별법은, 2005년 8월 국회 최초로 원폭 관련 법안 발의를 했다. 당시 조승수 국회의원과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곽귀훈 전회장, 공대위 공동대표였던 필자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통과되지 못한 상황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 2월 17일 법안심사소위원회와 전체회의에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가결했다. 이제 19대 국회 본회의 의결만을 남겨둔 상태이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 하의 과거사 피해 문제인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에 대한 관련 법안이 제정·시행되어 왔으나 원폭피해자는 지난 70여 년간 국가 차원에서 어떠한 법률적 조치도 없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법안의 상임위원회 가결은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가결된 법안은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마련한 대안 법안으로 이전에 발의됐던 4개의 법안들에 비해 퇴보한 법안이다. 이번 원폭피해자 특별법 대안법안은 현재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이미 지원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겨우 법적 근거만 마련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안 법안에는 원폭피해자의 자녀를 비롯한 후손 문제가 제외되었다. 원폭피해자단체와 함께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는 앞으로도 원폭피해자 특별법 법안의 제정과 개정 과정에서 원폭피해자와 그 후손 문제가 진정으로 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고 김형률님의 11주기를 맞이하며
올해로 고 김형률의 11주기를 맞이한다. 특별법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시점에서 여전히 남겨진 과제가 많아 ‘김형률추모사업회’의 운영위원장으로서 준비하는 마음이 무겁다.

 

작년 김형률 10주기 추모제 때 부산 민주공원에서 추모 식수행사를 마친 뒤, 고 김형률의 부모님(제일 왼쪽과, 오른 쪽 두번째)과 함께 찍은 사진(제일 오른쪽이 필자)
사진 제공=강제숙

 

작년 10주기 때는 광복 70년, 원폭 70년을 맞이하여 소외되고 잊혀진 ‘한국인 원폭피해자와 원폭 2세 환우’의 인권 회복을 위해 투쟁한 고 김형률을 추도하며, 그를 기리는 추모나무를 심는 식수 행사를 가졌다. 더불어, 당일 세운 비석에는 고인이 생전에 늘 말했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그 뜻을 이어 ‘모심이’ 주최로 오전 10시 부산역 광장에서 부산 시민들도 동참한 시민행진을 가진 뒤 추모제에 참여했다. 그리고, 2001년 부산에서 고인을 처음 만난 이후 교류를 이어오며 그의 운동을 지원한 아오야기 준이치 선생님의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한국어판도 출간되었다.
한편, 올해 11주기는 오는 5월 28일(토)에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강제숙(김형률추모사업회 운영위원장,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공동대표)

탈핵신문 2016년 5월호 (제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