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국의 탈핵 진영은 두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첫 번째는 부산 시민들의 염원이었던, 노후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의 폐쇄였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지 않고 단합했던 지역의 정치적 영향력이 중앙정부의 고집마저 바꿔놓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경상북도 영덕에서 진행됐던 신규 핵발전소 관련 주민투표였다. 정부 측의 각종 협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보궐 선거 보다 많은 영덕군민들이 참여해 압도적인 비율로 핵발전소 반대라는 군민들의 바람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성과 덕분에 탈핵 진영의 분위기는 좋은 편이다. 환경운동연합은 2000년 이후 침체됐던 시민단체의 분위기를 쇄신하며, ‘이제는 이기는 싸움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타 지역에서도 주민투표를 진행하겠다며, 중앙정부를 위협하고 있을 정도로 새해 탈핵 진영에는 활기가 넘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경사 뒤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속담을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한다.
최근의 성과는 탈핵 진영의 결집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중앙정부의 세련되지 못했던 대응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과는 얼굴 한 번 마주하지 않은 채, 세종시 정부종합청사에서 지원 대책만 쏟아내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안이했던 편의주의적 대응 방식과 구태의연한 밀어붙이기 전략이 최근 성과의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탈핵 진영은 이처럼 권위주의적인 정부의 낡은 대응 덕분에 힘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환경단체들은 세련된 정부 대응에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며, 손 놓고 바라보기만 했었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2005년 노무현 정부가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입지 선정을 주민들 스스로 결정하라며, 중앙정부의 권한을 상당부분 이양하면서 지역간 경쟁을 부추기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핵 쓰레기 처리장이 경주에서 건설되는 과정을 넋 놓고 지켜봐야만 했었다. ‘응답하라 1988’ 시대의 운동 방식에 익숙한 탈핵 진영은 21세기의 참여적 대응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1980년대로 회귀한 지금의 정부는 탈핵 운동을 전개하기에 오히려 손쉬운 상대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처럼 좋은 시기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호황기를 마냥 즐기기만 하다가는 또 다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탈핵 진영은 희희낙락하기 보다는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 차분히 내공을 쌓아야 할 것이다.
한국의 탈핵 르네상스는 앞으로 2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7차 전력수급계획이 수립된 이후, 지금은 발전소가 남아 폐업을 걱정하는 상황이어서 다음 계획까지는 말썽 많은 핵발전소를 굳이 짓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당은 작년에 원자력 관련 당론을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정당이 분열된 지금은 선거 캠프 꾸리기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도 탈핵 논의는 묻힐 가능성이 크다. 물론 2년 뒤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쟁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정치적 특성상 환경문제나 핵발전 이슈가 부각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탈핵 진영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2년 정도 벌어놓은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 좋은 시기를 허공에 날려버리지 말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공을 쌓는 데 투자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 탈핵 진영도 공부를 해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핵발전이 싫다’에서 끝나지 말고, 핵발전을 대체할 수 있는 한국적 재생가능에너지를 찾아내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재정을 예상할 뿐만 아니라 제도적 개선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즉, 정책적 대안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 탈핵 진영의 체력을 길러야 한다. 핵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닌 세력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해야 한다.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힘을 모으는 것도 좋겠지만, ‘삶의 정치’를 표방하며 탈핵 진영의 정치 세력화를 전면에 내건 녹색당을 지원하고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동안거를 준비하는 탈핵 진영의 두 가지 숙제도 쉬운 것만은 아니다. 주류 담론으로부터 항상 제기되는 ‘대안 없는 반대’라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대안은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탈핵 진영의 정치적 세력화도 쉽지 않은 과제이다. 통합진보당의 해산 이후 진보 진영의 침체는 녹색당의 정치 세력화에도 불리할 수 있다. 실제로 녹색당이 이번 총선에서 한 명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만드는 작업은 천지개벽만큼이나 어려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만큼은 명심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숙제를 해내지 못한다면, 즉 탈핵 진영이 내공을 쌓지 못한다면, 경주 방폐장의 악몽이 또 다시 재현되고 말 것이다.
※ 본지는 2016년 신설 꼭지로 탈핵신문 ‘칼럼’을 마련했다. 진상현(경북대 행정학부), 하승수(변호사,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황대권(영광핵발전소 안전성 확보를 위한 공동행동 대표) 세 분이 순차적으로 연재한다. 핵발전과 관련된 실천 또는 연구현장에서 느낀 생각과 고민을 자유롭게 발언해주길 기대한다. - 편집자 주
2016년 3월호
진상현(경북대학교 행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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