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후쿠시마 사람들…사람들의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후쿠시마 순례 시작…여기도 사람은 살고, 농사를 짓고 있다!
9월 24일(목) 아침, 다들 부산하게 움직이며 본격적인 후쿠시마 순례를 준비하였습니다. 전날 일본 가톨릭교회 정의평화협의회 전국집회를 마치고 동경 시내 요요기 공원에서 개최된 ‘사요나라 원전!’이라는 대규모 집회에 참석했던 흥분도 이미 사라지고, 드러내지 않는 긴장감이 가득했습니다.
대도시 동경에서의 축제와 같은 탈핵집회는,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에 소재한 숙소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풍경과는 역시 뭔가 달랐습니다. 나중에 듣게 되었지만, 이와키시는 후쿠시마현에서 재배된 쌀을 유통하고 있는 지역으로 정부와 지자체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3·11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하려고 애쓰는 지역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적응의 동물인 듯 후쿠시마현에 들어온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마시는 물도, 먹는 음식도, 내리는 비에도 약간은 무방비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다들 어수선한 아침을 바삐 마무리 짓고 서둘러 이타테무라로 이동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가는 길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거기에도 사람은 살고 있고 또 농사를 짓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더 따뜻한 남쪽이라서 그런지 논에는 이미 가을걷이가 거의 다 끝나서 논 가장자리에는 지주를 세워 얼기설기 교차하여 벼 나락을 모아 쌓아 말리고 있는 풍경이 눈에 띄었습니다. 속으로는 이 시기에 가을걷이를 하니 너끈히 2모작은 문제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방사능 제염작업한 폐기물이 담긴 톤마대가, 수백개씩 쌓여있는 모습을 가는 길 내내 목격
그렇게 중년의 한 선생님의 안내로 소마 농업고등학교 이타테무라 분교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는 길 내내 모두의 탄식을 쏟아내게 하였던, 흔히들 항공마대, 혹은 톤마대(약 1톤을 담을 수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듯)가 곳곳에 수십, 수백 개가 쌓여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검은색의 그 마대에는 제염작업을 한 폐기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일정 내내 계속해서 목격하며 우리가 바로 그 3·11의 후쿠시마에 있다는 것을 가장 상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폐교된 그 학교에서 이미 기준치를 넘어선 측정기를 앞에 두고 설명을 듣고 부랴부랴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두른 이유는 정부와 동경전력이 제공하는 자금 중 일부로 구성된 대규모 마을 규찰대가 우리와 같은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역사교훈여행. 전쟁, 재난·재해 등 역사적 비극이 일어난 장소를 방문하고 이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행위를 통해 교훈을 얻는 데에 중점을 둔 여행) 여행자를 감시하며 충돌하는 원치 않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하청 노동자의 제염작업 모습…핵발전은 노동을 착취하는 모순된 구조
그렇게 우리는 곧이어 미나미소마시의 히라마치 성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가는 길 내내 수많은 노동자가 제염작업을 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일당 4만엔(약 37만원)을 지급하지만, 정작 일하는 노동자는 하청에 하청을 거치며, 이 또한 겨우 1만엔(약 9만5천원), 혹은 1만5천엔(약 14만원)만 수령하게 되는 장면을 보노라면, 핵발전은 태생적으로 환경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정의마저도 거슬러, 노동을 착취하는 모순된 구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나미소마시 히라마치 성당에 도착한 우리는 간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하였습니다. 일본사람은 그것을 ‘대신’이라고 표현하지 않겠지만, 한국사람으로서는 간단한 요기처럼 느껴졌지만 따로 우리를 위해 김치를 준비한 것이며 아늑한 식사장소를 제공한 것을 두고 보더라도 친절한 일본인의 모습은 참 변함없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는 개인의 꿈, 삶의 의미, 존재의 가치를 내동이친 거대한 폭력
아주 작은 히라마치 성당에서 우리는 도쿄 시내 중학교에서 사회 선생님으로 계시다 귀농한 카츠야 미키코라는 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히라마치시의 옛 가옥을 임차하여 유기농업을 하면서 농가민박과 레스토랑을 경영하던 그녀가 3·11을 겪으며 퇴임 후 꾸었던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생계를 위해 다른 직업을 전전하다 지금은 초등학교 보조교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핵발전 사고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완전히 망쳐놓았는지를 다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환경재난은 한 사람의 꿈, 삶의 의미, 존재의 가치를 내동댕이치는 거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녀가 보조교사로 일하면서 느낀 핵발전소 사고와 그 이후의 흐름은 결코 정부와 사업자가 이 재난을 수습할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습니다.
3·11 이후 첫 1년 동안 아이들은 모자, 마스크, 긴소매, 긴 바지를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했답니다. 그러나 1년 후 1시간 정도의 야외활동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2년 후 피난 간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본교로 와서 운동회를 개최하였다고 합니다. 3년 후에는 폭풍우가 예고되어 제염작업이 안 돼, 고농도의 방사능이 아직 있을 것이라고 예견되는 산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올 위험이 대단히 큰데도 야외행사를 강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급기야는 동경에서 온 유명한 의사는 미나미소마시에서 개업하고 공공연히 언론 등을 통해 물이며 음식에서 방사능이 검출되지 않아 안전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소한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그녀는 국가가 바로 자신들을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후쿠시마 사람들은, 버려진 존재…“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아마 그들은 카츠야 미키코 씨의 말대로 버려진 존재일지 모릅니다. 결코 일본정부나 핵발전 사업자가 그들을 구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방치되고 스러져버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여행 중에 느꼈습니다. 미나미소마시 동경사(東慶寺)라는 절의 타나카 도쿠운 주지스님은 네 아이의 아버지로 승려 생활을 한 지 15년이 된 젊은 스님이었습니다. 3·11 사고가 나고 피난을 갔던 그는 결국 다시 후쿠시마로 귀환했습니다. 아이들과 아내, 그리고 어머니는 이와키시에서 피난생활을 하되 자신은 피난 가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보며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돌아왔던 것입니다. 후쿠시마를 도보로 순례를 하고 청소를 하며 피난 가지 못한 이를 보살피는 그분의 삶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고리 핵발전소 인근 지역을 무심결에 떠올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고리핵발전소 주변지역을 방문합니다. 핵발전의 끔찍한 현실을 떠올리며 위험성을 강조하는 말을 그 월내방파제 앞에서 소리치곤 합니다. 분명 방사능의 피해는 비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법 여러 번 일본 여행을 하였지만, 어쩌면 이번처럼 일본을 가장 깊숙이, 사람들의 숨소리를 가깝게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탈핵신문 12월호 (제37호)
김준한(신부,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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