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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체르노빌의 목소리』, 새잎, 2011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체르노빌을 경험한 103인의 목소리

 

이 책을 읽어내기는 좀체 쉽지 않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엄습하는 먹먹함 때문이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의 초기 진압에 투입되었다가 방사능에 고농도로 피폭당한 소방대원들이 있다. 불에 맞서 싸워 조국과 세계를 구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과 싸워야 했고, 하나 둘씩 죽어갔다.

소방대원 남편이 비밀리에 이송된 모스크바 병원으로 찾아간 여인은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과 뱃속 아이의 안위보다 그를 포옹하고 보살피고 싶다는 갈망이 더 컸던 것이다. 체내에 남은 방사능이 가져오는 끔찍한 고통 속에 남편은 여인의 곁을 떠났고, 여인은 체르노빌의 상흔을 온 몸과 마음에 간직한 채 살아간다.

이 여인과 같은 많은 이야기들이 십여년이 넘도록 무지와 편견 때문에 또는 정치적 압력이나 회피로 인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목소리를 얻지 못한 채 각자의 가슴 속에 묻혀 있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나 언론 기사는 대부분 체르노빌의 영웅들을 부각하거나 자극적인 소재를 자극적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작가는 체르노빌을 여러 위치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103명의 목소리를 날 것 그대로 모아 전함으로써, 1986년의 체르노빌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아니 느끼게 해준다. 올해 노벨상위원회가 작가에게 수여한 문학상은 체르노빌레츠(체르노빌의 사람들)’를 향한 것이기도 할 것임이 분명하다.

하루아침에 체르노빌레츠가 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핵발전소는 사모바르(러시아 주전자)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안전하다는 정부의 선전을 의심치 않았고, 사고의 내막을 알지 못한 채 맨몸으로 집을 떠나야 했으며, 조국과 인민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고 수습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난 오이와 감자, 우유, 보드카를 거리낌없이 먹었다. 이들이 가졌던 사명감과 허영, 맹신과 불신, 직관과 오해, 용기와 공포, 사랑과 절망 모두가 인간의 것들이었다. 다만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바람이 벨라루스로 향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나와 나의 어린 유리크에게로바로 그날 아들과 숲에 놀러 가서 괭이밥을 뜯었다. 왜 나한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172)라는 구절처럼, 이들에게 제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누구 하나 없었던 것이다.

목소리는 모여서 합창이 된다. 책의 각 장 끄트머리에 실려있는 군인의 합창, 민족의 합창, 어린이 합창은 체르노빌이 이들에게 얼마나 넓고 깊고 다양하게 각인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합창 속에서 체르노빌레츠는 편견과 냉대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것이고 그 교훈을 나누어줄 것이다.

우리 주변의 핵발전소와 송전탑 근처에서도 이제껏 들리지 못했던 많은 작은 목소리들이 더욱 증폭되어 세상에 전해지기를 기대한다.

 

 

 

탈핵신문 2015년 11월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