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중반에 유타, 네바다, 아리조나주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배우와 스탭들 다수가 유독 암과 백혈병으로 죽었다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이런 괴담을 유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일본의 반핵 언론인 히로세 다카시 선생이다. 이미 25년 전에 『원전을 멈춰라』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거의 그대로 예상했던 히로세 다카시 선생의 주장이니 함부로 괴담으로 치부할 게 아닐 터다.
1956년에 촬영된 〈정복자〉는 좀 이상한 영화였다. 220명이나 되는 스탭과 배우들이 동원된 대규모 액션 영화였는데, 미국 서부영화의 영웅 존 웨인이 몽고인 왕 역을 맡았고 수전 헤이워드가 그를 사랑하는 달탄족 공주로 나섰으며, 몽고의 고비사막은 유타주의 사막으로 대체되었고, 근처에 거주하던 시브위트족 인디언 300명이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 해는 〈자이언트〉, 〈왕과 나〉,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헐리우드 대작들이 유난히도 많이 쏟아져서인지, 〈정복자〉는 들인 노력과 돈에 비해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잊혀져갔다.
그런데, 그 후 〈정복자〉 촬영에 참가했던 사람들 사이에 괴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존 웨인부터가 1964년 폐암으로 두 차례 수술을 받고, 1979년에는 위암이 또 발병하여 그 해 6월 사망했다. 수전 헤이워드는 피부암, 유방암, 자궁암이 발병한 이후 1975년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감독 딕 파웰도 1963년에 임파선 계통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으며, 한 조연배우는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권총 자살했다. 1980년까지 220명 중 90여명이 암 진단을 받고 이 중 50여명이 사망했다. 촬영장과 가까운 세인트조지시의 주민들에게도 암과 백혈병으로 인한 죽음이 갑자기 꼬리를 물었다.
십수년 후 마침내 퍼즐이 맞춰졌다. 네바다 사막에서 미군에 의해 1951년부터 1958년 사이에 97회나 지상 혹은 지하 핵실험이 진행되었고, 여기서 발생한 죽음의 재가 촬영장의 모래와 록키산맥의 눈 녹은 물을 통해 이즈음 이 지역에서 활동한 영화인들과 군인(아토믹 솔저!)들의 몸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미군과 정부는 바람이 캘리포니아나 라스베가스 쪽으로 불지 않는 날을 골라 실험을 했지만, 죽음의 재는 산맥을 따라 오히려 촬영장과 소도시 쪽으로 모여들었다.
체내 피폭의 무서움, 지금 진행중인 ‘균도소송(핵발전소 주변지역 주민, 암 등 건강피해 소송-편집자 주)’과 크리스토퍼 버스비 박사(유럽방사선리스크위원회(ECRR) 과학위원장, ‘균도소송’과 연관된 핵발전소 주변지역 주민들의 ‘갑상선암 공동소송 증인-편집자 주)의 법정 증언이 알려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방사능의 정체를 제대로 모른 채, DNA와의 결합 원리도 모른 채 핵에너지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만들어낸 방사능 물질은 열혈 애국배우 존 웨인을 쓰러뜨렸고, 그리고 저선량 방사선과 핵폐기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선지자적 혜안으로 이 책을 번역한, 재작년 가을에 작고하신 1세대 반핵운동가 김원식 선생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은 책이다.
존 웨인, 게리 쿠퍼,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같은 서부영화 출신 스타들은 왜 죽었는가?
탈핵신문 2015년 10월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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