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70주년, 핵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올해의 부산반핵영화제 준비는 그전 영화제들에 비해 조금 늦게 시작되었습니다. 올 4월 초에 첫 회의가 있었는데, 당시는 부산지역의 고리1호기 폐쇄 운동으로 바쁘고 혼란스러운 때였습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첫 회의에서 ‘올해의 주제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고리1호기 폐쇄 운동의 분기점이 어떻게든 6월안에 만들어질 것이고, 김형률 씨가 돌아가신지 10년이 되었고, 광복 70년 즉 원폭 70년이 되는 해이자 밀양 행정대집행이 이뤄진 지 1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핵폭탄 70년, 핵기술로 인한 비극이 시작된 해에 집중하여 핵기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선정하는데 그간 국내외에 소개되었던 반핵영화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화들을 찾고 섭외하였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영화들이 개막작인 ‘히로시마 평양’과 ‘A2-B-C’, 7편의 해외 단편애니메이션, 그리고 ‘오래된 희망’이었습니다.
개봉작, ‘히로시마 평양’…피폭자는 북한에도 있다!
‘히로시마 평양’은 평양에 살고 있는 피폭자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조선인들이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 그러한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았습니다.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본인 감독에게 직접 연락을 하여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이미 한국에도 몇 번 소개가 된 영화였습니다. 핵폭탄 70년을 맞아 핵무기가 가진 반인권성과 반생명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였습니다.
일본 내 상영 금지 ‘A2-B-C’, 후쿠시마 갑상선암 다룬 다큐
‘A2-B-C’는 섭외와 상영에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영화였습니다. 작년 제4회 부산반핵영화제를 마치고 난 다음 일본의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5회 반핵영화제를 준비할 때 이 영화의 상영을 고려해 보라는 연락이었습니다.
‘A2-B-C’는 갑상선암을 진단하는 기호로 이안 감독은 이 기호를 영화의 제목으로 옮겼습니다. ‘A2-B-C’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후쿠시마에서 발생한 갑상선암 발병 사례를 다루고 있으며,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부모들을 인터뷰한 다큐였습니다.
일본정부는 이 영화의 일본 내 상영을 금지했다고 했는데, 영화를 보며 그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로 이한 방사능 오염 제거는 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확실하게 처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피난을 가지 못한 가족들은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증상들을 온 몸으로 견뎌내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모두가 무거운 마음들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7개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 ‘핵 없는 사회’를 위해 모두 흔쾌히 상영 허락
7개의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영화들을 먼저 선정하고 각 감독님들에게 연락을 하여 상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GROUND ZERO’의 감독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남편(Ken)이 그녀의 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한국에서 그녀의 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매우 기뻐했고, 그녀 역시 핵 없는 사회를 위해 영화의 한국 상영을 매우 기뻐할 것이라 말하며 ‘GROUND ZERO’의 상영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Ken 뿐만 아니라 6편의 감독들 모두 기꺼이 자신들의 영화 상영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 짧은 다큐멘터리들은 핵무기와 핵실험, 핵발전소와 핵폐기물 등 핵기술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선정하고, 감독과 이야기하고, 직접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여러 가지 실천들을 만들어 내면서, 핵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 단편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가지 실천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아 무척 힘이 나는 영상들이었습니다. 물론 단편 애니메이션 특유의 재미와 실험정신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폐막작 ‘오래된 희망’,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의 기록
‘오래된 희망’은 제5회 부산반핵영화제 폐막작이었습니다. 밀양의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약 3년간의 밀양 어르신들 싸움을 기록한 이 영화는 단순히 밀양 싸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에너지정책과 핵마피아들의 행적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웃음과 분노, 슬픔과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폐막작을 보기 전 어린이책시민연대에서 주관한 ‘탈탈원정대-북콘서트’가 진행되었는데, 관객들은 어르신들과 함께 ‘오래된 희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밀양 행정대집행이 끝난 지 1년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밀양 싸움이 이미 끝났고 진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그날 본 것은 분명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텃밭’, ‘아이언자이언트’를 함께 보고, 이진섭 선생님의 ‘한수원과 갑상선암 소송 한판’ 강의를 영화제에서 진행하였습니다. 짧은 영화제 기간이었지만 핵기술로 인한 문제들을 모두 고민해보고자 하였습니다.
부산반핵영화제, 고리1호기 폐쇄 이후 보다 근본적인 탈핵운동을 고민하는 계기 부여
부산은 고리1호기의 폐쇄 결정으로 탈핵운동의 새 국면에 서 있습니다. 부산반핵영화제가 그간 고리1호기 폐쇄운동에 집중해 있던 부산반핵운동의 과제와 실천들을, 보다 근본적인 탈핵사회를 위한 운동들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작지만 의미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내년에는 핵없는 사회를 위해 보다 구체적인 과제들과 실천들로 부산반핵영화제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희망합니다.
정수희(제5회 부산반핵영화제 운영위원장, 에너지정의행동 부산지역 활동가)
2015년 8월 (제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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