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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6월 11일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능멸의 정석은 이것이다

 

 611일 밀양송전탑 행정대집행, 능멸의 정석은 이것이다

 

황성원(에너지정의행동 회원, 번역가)


()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으로 이 세상에 알려진,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이 또 한 차례 큰 시련을 겪고 있다.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인 지난 611, 2천여명의 경찰을 앞세운 정부와 한전은 밀양 주민들의 저항의 최후 거점인 4곳의 농성장을 한순간에 초토화시키며, 송전탑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다. 탈핵신문은 밀양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연속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마찬가지 문제의식으로, 611일 당일 현장의 분위기를 전하기 위해 오랫동안 반핵운동에 함께해 온 황성원 씨에게 르포(현장탐방기사)를 의뢰했다. 더불어, 623일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가 발표한 굴하지 않는 인간 정신이 여기에 있습니다! - 밀양 송전탑 시즌 2를 위한 시론(試論)’, 지금까지의 밀양 상황과 향후 계획을 잘 정리하고 있어, 그 전문을 게재한다. - 편집자 주

 

 

<사진출처 : alfdid765kvout (my765kvout.tistory.com)>

 

2014611일 새벽 3. 127번 공사저지용으로 만들어진 움막에서 몸을 일으켰다. 발치에는 대여섯분의 할매들이 비좁은 공간에서 몸을 이리저리 포갠 채 잠들어있었다. 소변이 마렵기도 했지만 잠자리가 불편해서 더 이상 누워있기도 힘들었다. 움막에서 십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마련된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수녀님 몇 분이 일어나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있었다. 지난밤 자리에 눕는 듯 마는 듯 했던 동래할매는 어느새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결사항전을 앞둔 그 시각에도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야 한다는 그네의 집념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모두들 피로와 긴장이 범벅된 얼굴이었지만 큼직하게 썰어낸 깍두기와 열무김치, 콩나물과 고사리나물을 가지고 동래할매가 결연하게 차려낸 밥상 앞에 순순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삼십명쯤 되는 사람들이 일사분란하게 돌아가며 밥을 먹고 설거지까지 마치는데 소요된 시간은 고작 20분 정도. 행정대집행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는 4시가 안되어 모두들 따뜻한 인스턴트커피까지 한잔씩 맛볼 수 있었다.

새벽 6. 예상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도 별다른 조짐은 없었다. 움막 안에는 할매들과 수녀님들이 쇠사슬로 자신의 몸과 움막, 그리고 서로의 몸을 묶고 있었다. 이십명쯤 되는 연대자들은 움막 밖에서 행정대집행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진입로에 앉거나 누워있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가방은 옆자리에 앉은 부산녹색연합 활동가의 차에 넣어두었다. 몸에 지닌 것은 달랑 신용카드뿐이었다. 박훈 변호사의 선창으로 한동안 구호를 외치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지만 예상시간을 넘긴 뒤부터 슬슬 화장실을 오가기도 하고 간식을 찾아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도 했다. 약간의 움직임이나 소리에도 온신경이 곧추서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간혹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아니 사실은 나 자신을 달래려고 애쓰기도 했다.

아침 7시 반. 사위가 희부옇게 밝아올 때쯤, 129번에서 먼저 행정대집행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27번 현장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 있는 129번 현장에서는 간간이 함성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예상시간에서 멀어질수록 혹시 오늘이 아닌 게 아닐까 실낱같은 희망이 솟아났지만, 이제 그 희망은 내 비겁함을 증명할 뿐이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129번을 향해 ‘129 힘내라고 소리를 지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았다. 겨우 진정하고 옆을 돌아보니 한 청년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129 힘내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침 8시 반. 129가 모두 무너지는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129보다는 오래 버티자는, 결의인지 격려인지 체념인지 모르겠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맞장구치는 사람은 없었다. 간밤에는 제대로 발 뻗고 눕기도 어려울 정도로 북적이는가 싶었는데 막상 대오를 정리하고 앉아보니 기자가 더 많아보였다. 127번 움막을 수놓은 꽃밭 너머로 흰 모자를 쓴 한전직원들과 감청색 제복의 경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지할 것이 서로의 몸밖에 없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들려나갔다. 움막 안으로 진입하려는 경찰과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 간에 그나마 몸싸움이 벌어졌지만, 비닐로 된 움막의 옆구리를 찢으면서 움막의 속내가 속절없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움막 안의 사람들을 끌어내기 위해 경찰들은 먼저 방해가 될 만한 물건들을 하나씩 들어냈다. 기자도, 국회의원 보좌관도 짐짝처럼 치워졌다. 찢어진 움막 사이로 필사적으로 버티다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였다. 더 이상 움막 안에 남은 사람이 없게 되자 경찰들은 속도를 내며 움막을 해체했다. 움막 앞으로 들려나온 사무국장님이 쓰러진 여성을 살피며 구급차를 애타게 불렀지만, 둘러선 경찰들은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고령의 할머니들을 극도의 분노와 흥분상태로 몰아넣으리라는 것을 뻔히 예상하고도 협소한 도로를 핑계대며 구급차를 대동하지 않은 저들의 무대책함에, 아니 무대책을 가장한 노골적인 살의에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아침 10. 부산녹색연합 활동가의 차를 얻어타고 평밭마을 입구로 내려와보니 사람들의 수는 더 줄어있었다. 몇몇 뜻맞는 사람들과 함께 시내의 상황실로 이동했다가, 아직 115번 현장과 101번 현장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101번 현장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정오 12. 지난밤의 급박함과 분주함을 증명하듯 24시간만에 밥을 먹는다는 상황실 사람들 중에서 101번 현장으로 진입하는 길을 잘 아는 한 사람이 승용차 세대분의 사람들을 인솔했다. 경찰이 왠만한 진입로를 모두 막고 있는 통에 아는 사람이 아니면 결코 찾을 수 없는 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내에서 차로 30분 가까이 달려 한 마을에 당도한 뒤 인솔자는 지체없이 산길을 밟았다. 그 사이 115번 현장의 행정대집행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101번 차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너무 늦기 전에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에 뒷사람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묵묵히 걷는 데만 집중했다. 얼마 안가 땀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땀을 닦을 겨를조차 없었다. 내처 가파르기만 한 길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끝은 있었다. 경사길이 끝나고 능선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101번 현장이었다. 큰 움막 한동이 전부였던 127번과는 사뭇 다른 구조였다. 127번의 움막보다는 작은 움막 한 동에 능선이 만들어낸 평지를 따라 여러 동의 텐트가 솟아있어서 흡사 캠핑장 같은 풍경이었다. 움막 너머로 영남알프스의 유려한 곡선이 겹겹이 그림처럼 뻗어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시야를 가로막는 100번 송전탑만 아니라면 하룻밤 별과 달을 머리에 이고 묵어가도 좋을 그런 곳이었다.

오후 1. 101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행정대집행에 대응할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신부님을 비롯한 남자 셋은 움막 위에, 그 외 주민들은 움막 안에, 그리고 나머지 연대자들은 움막 주변에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연대자의 수는 127번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지만 127번에서는 북새통을 이루던 기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한결 한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곧 115번의 행정대집행이 마무리되자 그쪽에서 취재를 끝낸 기자들이 하나 둘 101번 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힘겹게 산을 오른 기자들은 숨을 고르기도 전에 115번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네 곳의 현장 중에서 연대자가 가장 많은 곳이었지만, 가장 힘없이 무너진 모양이었다. 이제 정말 101번 차례였다. 처음으로 행정대집행을 기다리던 새벽의 127번에선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했는데, 그래도 두 번째라고 한결 호흡이 차분했다.

오후 4.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지면서 101번에는 기자들, 이미 무너진 세 현장에 있던 일부 연대자들이 몰려들어 묘한 활기를 띠었다. ‘온다는 말이 세 번쯤 허방을 치고 난 뒤, 드디어 아침에 보았던 그 무리가 다시 나타났다. ‘인권지킴이조끼를 입은 변호사가 확성기로 먼저 적법한 절차를 요구했고 경찰의 채증을 중단시켰다. 변호사의 기세 때문인지 어쩐지, 127번처럼 경찰이 월권을 하며 막무가내로 움막을 철거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도만 좀 더디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흰색 헬멧을 쓴 한전 직원들이 움막을 철거하는 동안 경찰이 팔짱을 끼고 버티는 사람들을 하나둘 끌어냈다. 평균 17 정도였으므로 결과는 뻔했다. 움막 안팎에서 끌려나온 사람들은 불과 1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차곡차곡 고착당했다. 무거운 장비를 혼자 멘 인도주의의사협의회 의사 한명이 쓰러져 늘어지거나 건드리기만 해도 경기를 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살폈다. 의사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도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마지막 현장까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데 대한 좌절과 분노, 모멸감과 무력감은 광기에 가까운 증오로 뭉쳐져 고착된 사람들을 채증하던 앳된 경찰들에게 퍼부어졌다.

오후 5. 탈진한 사람들을 이송하기 위한 119 헬기가 몇 번 오르내리고, 고착상태에서 채증담당경찰들과 한동안 대거리를 하다 조금씩 진정국면으로 접어들 때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움막을 부지런히 걷어낸 한전 직원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전기톱을 가지고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중삼중으로 경찰에 에워싸인 사람들은 다시한번 오열했다. 하지만 유린은 끝나지 않았다. 119 구조헬기인줄 알았던 헬기가 오열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을 고착하거나 아니면 그저 이동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사막의 모래폭풍 같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벌목 후 금새 맨살이 드러난 현장에 컨테이너와 포클레인과 공사장비를 실어 날랐다. 이제 막 산길을 내려갈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한번 더 악에 받쳤다. 하지만 한전직원들은 경찰포위망 뒤편에서 유유히 포클레인 시험운전까지 하고 있었다. 밤을 도와서라도 그날 중에 터파기를 마칠 기세였다. 움막에서 강제로 끌어낸 것보다도, 그렇게 끌려나온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공사를 하는 모습에 더 기가 질렸다. 가히 능멸의 정석이라고 할만한 작태였다.

 

2014624일 밤 11, 서울 변두리 동네. 잠이 오지 않아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물었다. 사위가 캄캄해야 할 시간이지만 저 멀리 골프연습장에서 뿜어내는 불빛이 거실까지 쏟아져들어온다. 노래방도, 십자가도 허공에서 빨간 네온등을 밝히고 있다. 저들의 흥겨움과 복됨에서는 일말의 미안함도, 수치심도 느낄 수 없다. 그렇다면 저 교회 지붕아래선 사람들이 어떤 죄를 사해달라고 빌고 있을까. 나의 소비를, 유흥을, 죄사함을 위해 누군가는 지금도 보혈을 흘리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611일의 기억이 선명한 못자국처럼 남았다. 이 못자국에선 더 이상 피는 흐르지 않지만 아련한 흙내가 번진다. 이 아련함마저 흩어져버리기 전에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온몸이 외친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언제나 그렇듯.

 

발행일 : 2014.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