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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우리마을 이야기'와 밀양

우리 마을 이야기와 밀양

이계수(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학원 시절, 지금은 작고한 교수님으로부터 나리타공항을 건설할 때 주민들이 땅굴을 파서 저항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땅굴을 팠다기에 나는 깊이 1미터 폭 1미터 정도의 개인 참호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오제 아키라가 그린 산리즈카투쟁은 참으로 대단한 저항의 역사를 보여준다.

전부 7권의 우리 마을 이야기두 질을 주문하여 내가 근무하는 대학 도서관에 입고시켜두고 학생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한 것이 20126월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이 만화를 대출해서 읽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꼭 1년 뒤인 20136월이었다. 그때는 밀양의 어르신들이 한국전력의 송전탑 공사 강행을 10일에 걸친 저항 끝에 일시 중단시켜 놓은 때였다. 이후 구성된 전문가협의체활동을 미덥지 않게 지켜보면서 책을 펴들었다.

 

 

 

우리 마을 이야기1966년에 시작하여 지금도 끝나지 않은 산리즈카(三里塚) 투쟁, 즉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을 소재로 한 만화이다. 만화는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공항 부지 선정, 공단의 무리한 진행, 공익을 앞세운 강제수용, 주민들의 대화 요구를 묵살하고 기동대를 동원하는 집행 등 매우 낯익은장면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누구든지 이 작품을 읽는다면 밀양을 떠올릴 것이다. 40여 년이 흘러도 미결(未決)’ 상태인 우리 마을주민의 주름진 얼굴은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배경과 등장인물을 밀양과 할머니, 할아버지로 바꾸면 이 이야기는 그대로 우리 밀양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40여 년 전 몸을 쇠사슬로 묶고 땅굴을 파고 똥바가지를 퍼부으면서 기동대와 공항공단 경비대에 저항했던 산리즈카의 어머니들은 이제 늙어 밀양의 할머니들이 되었다. 경찰과 한국전력 직원들 앞에서 무덤을 파놓고 옷까지 벗어가며 저항하는 할머니들은 산리즈카의 어머니들이며, 부당한 공권력과 공익의 논리에 저항하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사건은 진행 과정이나 추진논리가 빼어 닮았다. 그뿐이랴. 이 싸움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놀랄 만큼 유사하다. 주민들이 조금만 양보해주면 많은 국민들이 이득을 볼 수 있는데 왜 반대를 하느냐, 지역이기주의 아니냐는 시선들……. 하지만 그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보면, 과연 그 이득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애당초 나에게 돌아올 일도 없을 그 이득은 주민의 희생을 덮어버리기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 우리 마을 이야기는 조목조목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가 성실히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들을 건져올렸기 때문에 서사(敍事)는 탄탄해졌지만, 사실 이 만화를 읽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길고 긴 산리즈카 투쟁의 역사 중에서 초기의 일부만을 다루고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뒤에 수록된 연보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산리즈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고댠사의 모닝지에 연재될 무렵 정부와 주민 간 대화가 간신히 성사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고, 주민의 요구는 일부 수용되어 예정되었던 활주로 건설 계획 중 하나는 결국 중단된다. 수많은 비행기들이 뜨고 내리는 그 밑에서 삶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셈이다.

이 만화를 읽고 누군가는 김포와 인천과 부산과 광주, 그리고 수많은 한국의 공항들 뒤에 감추어진 역사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날아다닐수 있게 된 것은 우리들이 기어다니며땅을 일구어왔기에 가능했다는 것, 그런 우리들을 국가와 공단공사는 일방적으로 강제 퇴거시켜버렸다는 것,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기억만 하고 만다면 세상 어디서건 우리 마을의 이야기는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결말과 달리 밀양마을의 이야기는 보상()이 아니라 보장(거주 그 자체 혹은 살 집)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마을을 지키고 살 집과 장소를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인정(認定)투쟁에 대한 법적 보장이 돈으로만 환산될 수는 없다. 국가와 자치단체도 지역주민 스스로 위험성을 평가할 수 있게 하고, 공공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장소를 결정하는 과정에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하고, 필요하다면 위험시설을 폐쇄할 수 있는 권리를 해당지역사회에 부여하는 것이 돈으로 사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마이클 샌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제18대에 이어 제19대에서도 발의된 강제퇴거금지법은 긴 잠을 자고 있고 국회는 그저 밀양 송전탑 지원법(변전 설비 주변지역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만지작거리며 통과시켰다. 밀양에 언제 따뜻한 햇볕이 내릴 것인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서평의 작성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원 석사과정의 김학진 씨로부터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둡니다.)

발행일 : 201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