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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국 반핵운동의 선구자, 김원식 별세

한국 반핵운동의 선구자, 김원식 별세

윤종호 편집위원

 


   

한국 반핵운동의 선구자이자 반핵아시아포럼(No Nukes Asia Forum)의 제창자인 김원식 씨가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위암 등으로 1년 이상 투병생활 끝에, 지난 912() 오후 330분경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영면했다.

김원식의 영결식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의 귀국이 늦어져, 지난 920() 보라매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들과 가까운 지인들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시간 가량 조용히 치러졌다.

당일 영결식에 참석한 사토우 다이스케 씨(반핵아시아포럼 일본 사무국장)“‘핵발전소 시대는 최종단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핵무기도 핵발전소도 없는 세계는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운동은 이어집니다. 일본에서는 다카기 진자부로 선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싸움이, 한국에서는 김원식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싸움이 현재와 미래에 계승되고 있습니다. 20년 전 김원식 선생님이 제창하신 반핵아시아포럼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원식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조사(弔詞)에서 밝혔다.

김원식 씨는 90년대 초반 반핵자료정보실 대표를 역임하며, 죽음을 몰고오는 핵쓰레기, 핵과 인간(다카기 진자부로, 1993)등의 소책자를 펴냈고, 또 일본의 주요 반핵운동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한국에 히로세 다카시(위험한 이야기(푸른산, 1990) ), 다카기 진자부로(원자력신화로부터의 해방(녹색평론사, 2001) ), 고이데 히로아키(은폐된 원자력 핵의 진실(녹색평론사, 2011)등을 소개하며, 일천했던 한국 반핵운동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며, 한국 반핵운동 현장 깊숙이 관계해왔다. 그리고, 김원식 씨가 1992년 핵 문제는 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민중 스스로가 배우고 교류·연대하는 자리로써, 제창한 반핵아시아포럼이 1993년 제1회 일본 대회를 시작으로 작년 15회 한국대회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한편, 김원식 씨는 생전에 시신을 카톨릭병원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영결식 당일 카톨릭 병원 쪽에서 시신을 운구해 갔고, 향후 2년 후 유골을 돌려받을 예정이라고 하며, 유족으로는 이영구(), 김성재(아들) 등이 있다.

 


김원식 선생님을 떠나보내며

이헌석(에너지정의행동 대표)

 

1990년대 후반 어느 회의 자리에서 단체 활동가들끼리 회의를 하다가 국제핵사고등급(INES)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1등급과 7등급 중 어느 것이 더 위험한 사고인가하는 논쟁 아닌 논쟁이 붙었다. 지금이라면 논쟁이랄 것도 없는 상식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분명 책을 통해 체르노빌 핵사고가 7등급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를 말했지만 결국 활동경력이 앞선 다른 활동가의 한마디에 1등급이 더 높은 것으로 그냥 정리되었다.

반핵운동에 대한 제대로 된 책도 없었고, 영어 책을 읽을 수 있는 활동가는 한정된 상황, 인터넷은 아직 활성화되지 않아 소수의 도구였고, 해외 소식엔 모두가 어두웠다. 누군가 말한 소문에 근거해 정부와 맞서다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하는 일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핵은 죽음이다라는 선명한 구호 앞에 많은 것들이 설명되었고, 그 이상을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곤 했다.

김원식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이런 상황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던 1999년 즈음이었다. 수없이 많은 일본 반핵운동 서적, 그리고 조선공산당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역사 앞에 50년의 나이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 핵에너지가 문제인가? 자본주의와 핵발전의 관계, 일본 반핵운동의 역사 등등 여든에 가까운 연세에도 언제나 정정한 모습으로 김원식 선생님은 까마득한 후배 반핵운동가였던 나에게 끊임없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언제나 찢어진 신문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에 빠져있던 나에게 김원식 선생님은 보다 넓은 반핵운동의 신세계를 끊임없이 알려주었다. 특히 2000년 김원식 선생님과 함께 참석한 일본의 대표적 반핵운동가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 추모회는 전공투, 총평해산 등 부정적 인식만 가득하던 일본사회운동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1천여명이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 모여 진행된 다카기 진자부로 박사 추모회는 단지 한사람의 죽음을 기리는 자리가 아니라, 일본 전국에서 모인 반핵운동가들이 결의를 모으는 집회였다. 막연한 반핵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는 반핵운동, 애향심을 넘어 대중적 기반을 갖는 반핵운동은 여전히 생소했고, 다양한 책과 자료가 쏟아져 나오는 항상 공부하는 반핵운동의 분위기는 부럽기 그지없었다.

이후 10여년 동안 김원식 선생님과의 만남은 이어졌다. 그 때마다 나는 그의 책과 글, 말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반핵운동의 내용과 근거, 끈기를 배울 수 있었다. 그는 70~80대의 노인이었지만, 언제나 젊은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고, 젊은이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수혜를 받은 많은 이들 중 하나였다.

이제는 굳이 안 그래도 되지 않으시겠냐는 질문에 그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운동가는 단편적 존재가 아니라 세포가 되어야 함을 배웠다고 했다. 혼자 동떨어지더라도 스스로 살아가고 증식까지 할 수 있는 세포. 그리고 그는 그 역할을 훌륭히 잘 해내었다. 이제 그의 세포는 운명을 다했지만 그로부터 영향 받고 커 온 많은 세포들이 그 빈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온통 회색빛인 이 세상에서도 저 소나무만큼은 영원히 푸른 것처럼 말이다.

 

 

 

 

발행일 : 2013.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