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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8호>짧은 투쟁 그러나 긴 여운, 굴업도 핵혜기장 반대운동

<장면으로 보는 반핵운동사>

짧은 투쟁 그러나 긴 여운,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

이헌석 편집위원(에너지정의행동 대표)


덕적이라 하늘에는 별도별도 많지만, 반짝반짝 전깃불은 하나 볼 수 없어라,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덕적도 잘 자라고 잘 배워서 우리 섬을 깨우세

- 굴업도 반대운동 당시 덕적도 주민들이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에 맞춰 부르던 덕적도가()

 

뉴스를 보고 알게 된 핵폐기장 지정소식

90년 안면도에 핵폐기장을 지으려던 계획이 93년까지 중단과 강행을 거듭하며 사실상 진행되지 못하자, 정부는 새로운 방안을 찾는다. 지역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핵폐기장을 건설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992년 일본원자력문화진흥재단을 본뜬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설립되어 핵폐기장을 비롯 핵발전의 우수성에 대한 홍보를 시작하는가하면, 199410월부터는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과 탤런트 이정길씨가 나오는 라디오, TV 정책광고를 통해 핵폐기장 건설을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습니다는 광고를 시작했다.

조만간 새로운 핵폐기장 부지가 확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가운데, 19941215. MBC 뉴스데스크는 서해 앞바다 굴업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설 것이라는 특종보도를 한다. 당시 뉴스의 가장 앞부분 3꼭지가 굴업도 이야기일 정도로 이 문제는 큰 이슈였다. 전 국민은 물론, 반핵단체, 해당주민 모두 뉴스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굴업도 주민은 5가구, 10. 안면도에서의 지역주민 반발을 경험한 정부는 사실상 반대운동이 불가능한 낙도(落島)를 핵폐기장으로 택했던 것이다.

 

덕적도 주민들의 모진 투쟁

하지만 예상과 달리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운동은 바로 옆에 있는 섬 덕적도에서 시작됐다. 굴업도를 지척에 두고 있는 섬 덕적도는 인구수에서는 굴업도 보다 큰 섬이었지만, 작은 섬이긴 마찬가지였다. 안면도 반대투쟁 당시 섬이라는 지형은 연육교를 중심으로 바리케이트를 쌓고 투쟁하기 좋은 지형이었지만, 덕적도와 같이 작은 섬은 봉쇄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고립된 섬을 빠져나와 인천과 서울을 오고가며, 반대시위를 벌였다.

1215일 언론보도, 17일 덕적도에 500억 투자 발표, 22일 정부의 공식 확정 발표. 정부는 1주일 동안 일사천리로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다. 겨울인데다가 크리스마스와 연초가 되면 아무래도 지역주민들의 집회와 시위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덕적도 주민들은 몰려 나왔다. 22일 정부의 확정 발표가 있고 바로 다음날인 23일 서울에서의 집회를 비롯해, 덕적도 주민들은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집회를 인천과 서울에서 벌여냈다. 조용한 섬에서 살아가던 덕적도 주민들에게 집회와 시위 그리고 전경과 최루탄은 결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시위에 참가하시던 할머니의 죽음, 520일 폭력 진압으로 인한 50~60명 부상 사태, 환경운동가들에 대한 빨갱이, 불순세력운운 등, 덕적도 주민들의 처절한 싸움은 95년 지자체 선거를 넘기면서까지도 계속됐다.

어이없는 발표로 끝난, 351일간의 반대 투쟁

9412월에 시작된 덕적도 주민들의 투쟁은 인천 연안부두, 동인천역, 인천시민회관, 서울 정부종합청사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됐고, 한전 건물에서의 반핵 플랭카드 시위 등 적극적 선전방식, 95년 지자체 선거에서 덕적면 반대투쟁위원회 사무국장이 군의원 후보로 나와 찬핵-반핵 대결 등 핵폐기장 건설 반대를 위한 다각적인 투쟁이 진행됐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 비해 그 결말은 너무나 어이없는 것이었다. 당초 정부에서는 굴업도가 1)지질구조가 단단해서 안전하며 2)수심이 깊어 항만을 짓기 용이하고 3)주민 수가 적어 반대가 적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첫 번째 이유인 지질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91년도에 정부에서 지질조사 이후 부적격지로 건설 검토가 전면 백지화된 이후에 다시 굴업도가 선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환경단체들이 문제제기한 바 있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했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됐다.

굴업도에 대해 지질조사를 다시 하던 중 활성단층이 발견된 것이다. 핵폐기물 처리장은 매우 오랜 시간동안 안정된 공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활성단층이 있다는 것은 언제 핵폐기물이 생태계로 누출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951130일의 일이다. 351. 1년도 안된 짧은 싸움은 이렇게 끝났다.

또 하나의 승리한 투쟁, 그리고 많은 성과들

1년 동안의 짧은 투쟁이었지만,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은 많은 것을 남겼다.

굴업도 이전까지 핵폐기장 선정의 주체는 원자력연구소였다. 핵폐기장 건설계획에 제2원자력연구소 건설계획이 함께 포함돼 있기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핵폐기장은 핵산업계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핵연구계의 몫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굴업도 실패를 계기로 사업주체는 발전사업자인 한전으로 넘어가고 담당부처도 과학기술처에서 통상산업부로 옮겨진다. 이후 정부는 2000년에야 핵폐기장 부지공모 사업을 진행하지만,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고 그 흐름은 2003년 부안으로 이어진다.

굴업도를 계기로 핵폐기장 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로 확실히 부각된다. 안면도 투쟁을 겪기는 했지만, 굴업도는 짧은 기간 동안 정부의 사업추진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이 숨어 있는 지를 보여준 좋은 기회였다. 또한 당시 그린피스 등을 통해 국내에서 소개되기 시작한 퍼포먼스’, ‘직접행동이나 학생운동이 적극적으로 결합한 이후 환경현장활동으로 이어지는 반핵농활등 새로운 시도가 많이 나타난 것도 굴업도 투쟁을 전후한 일들이다.

이후 굴업도는 롯데건설과 CJ 그룹이 섬을 매입, 골프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추진하다가 인천시의 반대로 백지화되기도 했으나, 최근 이들 업체가 다시 건설계획을 밝히면서 또 다른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발행일 : 201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