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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획연재]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⑩ _ 나의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대한 기억

일본 핵기술 개발의 역사 ⑩ _ 나의 후쿠시마 핵발전소에 대한 기억

핵사고는 거리와 관계없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이번 호에서는 필자가 일본에 거주하며 겪었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경험을 다루고자 한다. 연재 주제에 적합한 내용일지 고민했지만, 핵발전소와 먼 수도권에 살던 필자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상당한 수의 독자들은 핵발전소에서 떨어진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을 통해 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전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 중 하나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

 

2011311일 당시 필자는 일본의 한 대학교에서 3년째 유학 중이었고, 도쿄와 인접한 사이타마라는 도시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대규모 지진은 동아리 친구들과 일본 중앙부 나가노로 여행을 갔다가 버스로 돌아오던 중에 발생했다. 예정에 없이 들어간 휴게소의 TV로 우리는 쓰나미에 모든 것이 떠내려가는 동북지방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엄청난 교통정체가 발생했고, 저녁 늦게 사이타마에 도착했으나, 강진으로 대중교통망은 끊겨있었다. 이날 도쿄의 직장인들이 길게는 10시간 이상 걸어서 귀가했다는 보도를 본 독자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는데, 버스가 내려준 곳이 내가 사는 집 근처여서 집이 먼 친구 세 명을 내 집에서 자고 가게 했다. 통신망도 마비되었기 때문에 모두 가족들과 제대로 연락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다. 인터넷은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일본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비교적 낮았고, 나 역시 구식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 친구에게 스마트폰을 빌려 가족에게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일본인 친구들은 계속 연락을 시도했다. 그 와중에 강력한 여진은 계속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그 날은 그렇게 저무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날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가 폭발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이틀 후인 14일에는 3호기가 폭발했고, 15일에는 2호기의 노심 손상과 4호기의 폭발이 발생했다. 나는 그전까지 핵발전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와 닿지 않았다. 체르노빌도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후쿠시마 사고 관련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후쿠시마가 기억에 없는 세대가 성인이 되면 핵발전 위험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무딜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닉에 빠진 일본 사회 전력 부족과 물건 사재기

 

사고가 진행되자 동일본의 전력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도쿄전력은 14일부터 관할구역을 5개 그룹으로 나누어 계획 정전을 실시했다. 내가 살던 지역도 대상이었으나, 정전이 실시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절전해달라는 보도가 계속 나왔기 때문에 가전제품 사용을 최소화했고, 밤에도 불을 켜지 않았다.

 

서일본에서 절전해 동일본에 전력을 보내자는 여론도 조성되었으나, 곧 동일본과 서일본은 주파수가 각각 5060으로 달라 어렵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또한 주파수를 변환한다 해도 송전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또한 이 시기 수도권 지역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발생했다. 자연재해와 핵사고의 동시 발생이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불안을 느낀 시민들이 쌀과 물뿐만 아니라 유통기한이 긴 가공식품과 휘발유까지 사재기한 것이다. 나는 뒤늦게 마트를 돌아다니며 몇 개 안 남은 가공식품이나 과자를 사고, 주변 친구들과 나누었다. 쌀이나 라면은 구하기 힘든 상태였다.

 

 

2011년 3월 14일, 휘발유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차량들(사진: 아사히신문)

 

가족들은 당장 귀국하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나는 비자 연장을 위해 여권을 출입국에 제출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할 수 있었던 생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친구들,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들, 은사님을 두고 간다는 선택은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나는 일본에 남기로 했다.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방사능의 공포

 

315, 바람이 후쿠시마에서 도쿄 쪽으로 불기 시작해 방사성 물질이 확산되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도쿄까지의 거리는 약 250km였지만, 도쿄에서는 평소보다 100배 높은 방사능이 측정된 곳도 있었다. 뉴스에서는 건강에 영향을 주는 수준은 아니지만창문을 닫고 있어라, 외출을 삼가라, 나가도 피부를 노출하지 말고 마스크를 착용해라, 외출 시 입고 있었던 옷을 세탁하라는 등의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나는 비로소 강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밖은 햇살 좋은 봄인데, 이 아름다운 풍경이 방사능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 창문을 닫는 것만으로 괜찮을까? 세탁하면 방사능이 없어질까? 가방은? 신발은? 피부를 다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는가?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방사능에 대한 불안은 끝없이 밀려왔다.

 

가족들도 걱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결국 아버지가 일본에 와서 나를 데리고 당분간 오사카에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급히 일본에 온 아버지와 하네다 공항에서 만나 오사카행 비행기를 탔다. 후일 아버지는 빈자리가 많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자식을 만날 수 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고 회고했다.

 

핵사고를 지켜보는 것

 

아버지는 사고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 도쿄로 돌아가자고 했고, 우리는 열흘 넘게 오사카에 있으면서 사고 진행 상황을 주시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평가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국제원자력사고등급’(INES)‘4’, 체르노빌보다 낮았다(한 달 후 체르노빌과 같은 ‘7’로 상향). 뉴스에서는 핵반응로를 냉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소방차가 물을 뿌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거나, 전문가들이 사고에 대해 해석하는 보도를 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핵반응로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노심용융이나 격납용기 손상 등 수많은 가능성만이 제기되어 혼란스러웠다(물론 이러한 가능성들은 나중에서야 현실이었음이 밝혀졌다).

 

혼돈이 진행되는 그 시간에도 오사카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평소처럼 먹을 것이 넘쳐났고, 상점들의 조명은 눈부셨다.

 

사고는 아직 진행 중

 

일본은 4월부터 새 학기였기 때문에 나는 곧 학교로 돌아갔다. 사람들도 일상을 되찾은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은 이전과 달랐다.

 

는 문득문득 지금 호흡하고 있는 공기가, 내가 밟고 있는 땅과 풀이, 손을 씻고 있는 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현실에서 계속 생활하려면 잊는 것이 편했다. 내가 속했던 환경의 특성일 수 있지만,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주변 사람과 사고나 방사능에 관한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다. 마트에서는 후쿠시마와 최대한 먼 곳에서 생산된 식재료를 사면 됐지만, 누군가와 외식할 때는 원산지를 신경 쓸 수 없었다.

 

다른 한편 가슴이 아팠던 것은 내가 일상을 보내고 추억을 쌓던 공간들이, 더는 이전과 같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쿄에서도 방사능 핫스팟이 발견되는 등 안전한 곳은 없었다. 나는 핵발전소 사고가 공간을 초월해 모든 것을 바꿈을 통감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일본인들은 사고를 계기로 사치스러운생활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생활을 핵발전이 떠받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정과 상점, 음식점에서도 조명을 일부만 켜두고, 절전하는 생활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일본의 전력소비량은 지난 10년간 감소 추세다.

 

20111216일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냉온정지를 확인했다며 사고 수습을 선언했다. ‘냉온정지란 핵연료의 냉각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돼 원자로 안의 온도가 100아래로 떨어진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이와 달리 사고는 아직 진행 중이고,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며 장기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은 도쿄 부근에 살던 필자의 시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핵발전소 주변 주민들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핵발전소 사고가 거리와 관계없이 모든 것을 불가역적으로 바꿔놓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이 시리즈 연재는 여기에서 마친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또한 항상 응원해 주셨던 용석록 편집위원장께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린다.

 

참고자료
시코쿠신문, “放射能漏れ関東に拡散/北風で通常の100倍も” (2011년 3월 16일자 기사)
닛케이, “電力、なぜ西日本から東日本に融通難しいか” (2011년 3월 24일자 기사)
일본 경제산업성 자원에너지청 홈페이지,
https://www.enecho.meti.go.jp/about/whitepaper/2019html/2-1-4.html

 

최종민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연수연구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사고를 목도한 것을 계기로 핵기술을 비판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자 결심하여 귀국 후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2020년 8월 「일본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담론투쟁: -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과 ‘원자력 안전신화’를 중심으로(1954-1980)」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탈핵신문 2022년 4월(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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