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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칼럼] 사용후핵연료 재공론화, ‘빛조차 바랜 개살구’

∥ 칼럼

사용후핵연료 재공론화, ‘빛조차 바랜 개살구



김수진 정책학 박사 


요즘은 공론화를 갈등 사안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문제일수록 공론화를 통해 해결점을 찾으면 효능감도 좋다. 시민 참여와 숙의 과정을 통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공론화의 가장 큰 이점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는 탈원전, 에너지전환 정책 이슈와 맞물리면서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을 끌어냈다. 하지만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사정이 다르다.


5년 전의 사용후핵연료 공론화는 결국은 핵발전소 부지에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소를 증설하는 결과 도출의 방편이라는 비판에 직면했고 시민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5년 만에 재공론화를 진행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공론화 위원장이 사퇴했고 시민사회는 공론화위원회를 해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5년 전 공론화를 정책으로 실현하는 데 실패한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가 다시 공론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5년 전과 판박이이다. 정부는 왜 재공론화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그저 공론화만 하면 모든 절차적 정당성을 인정받기라도 하는 듯 밀어붙이고 있다.


이번 사용후핵연료 공론화 숙의 자료집에는 공론화에서 다루는 의제가 실려 있다. 의제는 영구처분 및 중간저장시설 관련 사항, 사용후핵연료 관리원칙과 정책 결정 체계, 관리시설 부지 선정절차 및 관리시설 지역의 지원원칙 및 방식,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 관련 사항 등을 망라한다. 의제의 제목만 적기도 버거운데, ‘시민참여단이 짧은 기간 내에 관련 세부 의제를 모두 학습하고, 토론하고, 숙의하여결과를 도출한다고 하니 공론화가 요술 방망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다. 정부와 의회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여야 할 수많은 정책의제를 시민참여단공론화로 돌리고, 정작 중요한 쟁점은 피하고 있다. 탈원전 정책을 천명한 정부가 재처리를 여전히 정책 옵션으로 남겨두는 게 바람직한지, 현재의 임시저장시설은 외부의 인위적 공격에 안전한지 등.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소는 2000년대 초반부터 언제나 포화가 임박했다. 2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위정자들이 핵발전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핵폐기물과 핵발전정책을 분리하여 최대한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핵발전소 건설과 핵폐기물 처분 이슈를 성공적으로 분리한 셈이다.


핵발전은 핵무기 기술에서 유래했고 이런 이유로 가장 논쟁적인 에너지원이다. 핵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은 핵발전정책을 근원적으로 흔드는 강력한 이슈이다. 지금도 집권 여당은 핵폐기물이든 핵발전이든 사회적으로 논쟁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이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일도 하지 않는다. 신규핵발전소 건설 금지나 수명연장 금지를 법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부의 임시저장소 증설이 핵발전 확대의 토대가 될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시민사회단체는 정부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이번 공론화도 결국은 임시저장소 증설을 위한 요식행위라는 그들의 심증을 정부는 충분히 불식시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일거에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공론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지금은 최소한 서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다. 최소한의 신뢰와 지지도 확보하지 못한 공론화는 빛 좋은 개살구도 되지 못하고 빛조차 바랜 개살구이다.


탈핵신문 2020년 8월(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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