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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기사, 핵폐기물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를 위한 제언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를 위한 제언



황대권 고준위핵폐기물 전국회의 공동대표


2013년부터 지금까지 7년 동안 숱한 논란 속에 진행된 두 차례의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번 두 번째 공론화는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당사자인 산업부만 빼고 모두가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재검토위원회 정정화 위원장이 자신의 입으로 실패했다고 말하며 사퇴했고, 최근 청와대 수석비서관 5인이 정국혼란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스스로 책임지겠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그동안 시민사회 측과 지역주민들은 끊임없이 청와대를 향해 공론화를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대통령에게 건의문까지 올렸건만 반응은커녕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맥스터 추가건설에 반대하는 경주와 울산지역 주민들의 분노와 항의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산업부가 처음부터 이해당사자를 배제하고 공론화를 추진했기 때문이다.

 

재검토속셈 따로 있는 산업부

 

문재인 정부 공약사업 가운데 하나인 고준위핵폐기물 재공론화는 재검토라는 수상한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전 정권에서 만든 권고문을 백지화하고 처음부터 다시 공론화하자고 요구하였지만 그들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재검토란 이전 했던 어떤 행위를 다시 들여다보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때 쓰는 말이다. 재검토 결과 전의 것을 완전폐기하고 새로 해야겠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지만, 산업부는 처음부터 박근혜 정부가 만든 권고안보완하는 수준에서 공론화를 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박근혜 때 하려고 했다가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지역주민의 수용성 문제이다. 당시에 정부는 5개 핵발전소 인접지역 주민들의 여론조사 결과가 모두 반대의견을 표명한 상태에서 시일에 쫒겨 부랴부랴 권고안을 발표했다. 따라서 산업부는 이번에 어떻게 해서건 주민동의만 얻어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문제는 주어진 시간 내에 맥스터(사용후핵연료 대용량 건식 조밀저장시설) 건설에 대한 주민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정작 공들여 했어야 할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를 내팽개치고 말았으며, 주민동의를 구하는 과정 자체도 거의 조작에 가까운 수준으로 해치웠다는 것이다.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공법으로 해야 후유증이 적다. 급하다고 편법을 쓰면 쓸수록 나중에 문제도 더 커지고 비용도 더 많이 들어간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산업부는 공론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공론화 때부터 이 문제에 관여한 한 사람으로서 정부와 국민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공론화 해법을 여기에 제언하고자 한다.

 

산업부의 전문가 그룹 운영 오류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는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공론화를 한답시고 일반인을 모아놓고 강의 몇 차례 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거의 난센스에 가깝다. 문외한이었던 나만 해도 고준위 문제를 접한 지 한 3년이 지나니까 관련 용어를 비롯해 전체 그림이 겨우 그려질 정도였다. 우리가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할 때 주제에 정통한 한 사람이 발제를 하면 참석한 위원들이 함께 논의하듯이, 고준위핵폐기물 문제도 먼저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본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기본 텍스트를 가지고 국민들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그러자면 고준위핵폐기물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를 최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법을 통해 선임해야 한다. 재검토위원회도 산하에 전문가 그룹을 따로 두었지만 선임된 전문가들조차 그 공정성에 의문을 품고 30명 가운데 11명이 사퇴하고 말았다. 이들의 사퇴의 변을 들어보면 산업부가 부실한 공론화를 진행하면서 자기들을 들러리로 써먹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산업부가 비전문가로 구성된 재검토위원회 산하에 전문가 그룹을 둔 것은 명백히 오류다. 어떤 전문가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결과물을 비전문가의 판단에 맡기려 하겠는가? 전문가 그룹과 공론화위원회는 기능을 달리하는 별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한쪽은 텍스트를 만드는 그룹이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가지고 공론화를 진행하는 그룹이 되어야 한다.


고준위핵폐기물은 단일한 주제가 아니다. 지금까지 논의된 상황을 살펴보면 고준위핵폐기물과 관련된 주제(의제)가 한 20개 정도 된다. 각 주제마다 전문 영역이 다 다르다. 예컨대 핵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은 격납고나 방제문제에 대해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각 주제마다 전문가 그룹을 따로 구성해서 기본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주제의 유사성과 연관성에 의해 전문가가 겹칠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전문가의 성향인데 이것이 한국처럼 좁은 시장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큰 문제가 된다. 특정 대학의 핵물리학과 동문들이 똘똘 뭉쳐 핵산업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전문가를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가라는 직업이 누군가 자기를 고용해주어야 먹고 사는데 전문가치고 한수원또는 산업부와 용역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외국 전문가를 데려올라치면 국가기밀 유출이 우려된다고 거부한다.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외국의 전문가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 허용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국내 전문가로 하되 전문가 선임 위원회를 따로 꾸려야 한다. 그동안은 산업부가 알아서 선임했기에 여기에 대한민국 산업계의 일반적 병폐인 관과 용역회사의 유착 관계가 작용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문가 그룹에 의해 고준위핵폐기물에 관한 기본 텍스트가 만들어지면 비로소 공론화위원회가 나서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 텍스트를 국민에게 공지하고 지역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또는 국민)들의 의견을 묻고 수렴하는 과정을 거친다. 여기에 공론화의 다양한 기법들이 동원된다. 산업부가 주장한 중립적 위원회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금의 재검토위원회는 중립적이지도 않고 전문적이지도 않은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산업부가 아무리 중립적 위원회를 만들려 해도 반세기 가까이 핵산업 진흥정책을 지휘해왔던 이력으로 인해 중립적일 수가 없다. 공론화위원회는 대통령이 직접 관할하는 위원회이어야 한다. 최소 10만 년을 관리해야 하는 위험 물질 처분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데 한 나라의 최고 책임자가 직접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미래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 내려야

 

마지막으로 가장 골치 아픈 핵폐기물 임지저장시설의 우선적 설치의 문제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에 관한 기본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동안 생성된 핵폐기물을 한수원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임의 처분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안전 문제부터 주민 수용성까지 수많은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핵산업이 한창 성장할 때에 급하다고 미뤄놓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시점인 것이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 꿰어 못 쓴다는 속담이 있듯이 핵폐기물 문제도 실마리를 찾아 차분히 풀어나가야 한다. 만약 급하다고 기본방침도 없는 상황에서 임시저장시설을 허용하면 그것이 사례가 되어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될 우려가 있다. 2005년에 경주에 중저준위방폐장을 지으면서 급하다고 특별법까지 만들어 경주에 고준위방폐장을 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가 그것에 발목이 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현실에 처해 있으면서도 또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전력수급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전력이 남아서 걱정이다. 고준위핵폐기물 공론화가 결과를 낼 때까지 필요하다면 핵발전을 중단해야 한다. 물론 월성 핵발전소의 얘기이지만, 어떤 원전이든지 자꾸 예외를 만들어 내면 나중에 만든 기본법안이 누더기가 된다. 고준위핵폐기물 처분에 관한 기본법은 핵발전에 대한 찬반을 떠나 지금까지 생성된 핵폐기물을 처분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민들의 합의를 거쳐 성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산업부는 핵마피아와의 검은 유착 관계를 끊고 지금이라도 미래세대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탈핵신문 2020년 8월(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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