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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2호>일본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20만 항의 시위

'수국혁명' - 일본 핵발전소 재가동에 20만 명 항의

고노 다이스케 (편집위원)

일본 반핵시위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629일 총리관저 앞에는 오오이핵발전소 재가동에 반대하며 1520만 명이 모였다튀니지 ‘재스민혁명’과 연관시켜 ‘수국혁명(일본에서 흔히 볼수 있는 꽃으로, 작은 꽃망울들이 모여 큰 꽃봉우리를 이룬다. 개개인의 시민들이 모여 큰 흐름을 만든다는 의미)'이라 불리고 있다. 

 

후쿠시마 이후, 일본사회 억눌린 분위기 폭발

3.11 이후 약 한 달 동안 일본사회는 답답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엄청난 사태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언론들은 진실을 은폐하고, 후쿠시마에서 사고수습을 위해 분투하는 도쿄전력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조차 조성되고 있었다. 억압된 항의 욕구를 해방시키고 불안과 불만을 터뜨리고 싶다는 마음이 일본 시민들의 가슴 속에 쌓여 있었다.

처음 그것이 표출된 것은, 사고 보름 뒤인 지난 327일 ‘재처리 막고 싶다! 수도권 시민 모임’의 집회였다. 이 집회는 핵발전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매달 열던 것으로, 예전 참가자는 많아야 20명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 그 날에는 시민 1,200명이 모였다(피플스 플랜『ピープルズ・プラン』58).

그 후 시위규모 확대의 결정적인 계기는, 한 달 후인 410, 도쿄에서 독자적인 공동체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는 ‘아마추어의 반란’이 그들의 활동지역인 고엔지에서 주최한 ‘원전 관둬 데모’다. 핵심인물인 마쓰모토 하지메도 참가자를 최대 500명 정도로 예상해서 시위 신청서에도 그렇게 적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큰 조직의 동원도 없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정보만으로 15,000명이 모였다. 참가자는 예전과 달리 나이 든 사람보다 젊은이와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의 시위에는 밴드나 DJ들의 퍼포먼스와 댄스가 들어가고 각자가 악기를 울리고 분장하며, 참가자 중에는 ‘여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어’ 등 핵발전과 전혀 상관없는 피켓을 든 사람도 있다. 이러한 데모형식은 2003년 이라크반전투쟁 이후에 축적된 것으로, 500명을 규제하기 위한 경찰밖에 없는 거리에 수십 년 만에 자유로운 대규모 시위를 출현시켰다.

점점 커져 가는, 핵발전 반대의 목소리

 그 상황은 유튜브 등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통해 공개됐으며, 이후 마쓰모토에게는 “데모를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는 문의가 쇄도했다. 이 시위가 ‘적군파’ 이후 시위와 운동을 스스로 금지했던 일본 시민들에게 큰 문화적 충격을 줬다고 말할 수 있다. 919일에 유명 소설가 등이 발기인이 되어 개최된 ‘잘 가라 핵발전’집회에는 그 시점에서 최대 규모인 6만 명이 모였는데, 기존의 스타일로 진행되었기 대문에, 문화적 충격은 4월 10일 집회가 더 컸다. 

이후에도 ‘아마추어의 반란’은 여러 번 시위를 주최했다. 57일 시부야데모는 시위 규제에 숙달된 도심 경찰이 상대인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가 압살당했고 연행된 참가자도 있었다. 610일 제3차 데모 때는 그들을 포함해 세 개 그룹이 신주쿠 주변에서 시위와 행진을 마친 후 신주쿠역 앞에 집합함으로써, 이전에는 행진이 끝나는 대로 해산해 버려서 이루지 못했던, 이집트혁명 ‘타흐리르광장’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모습은 일부 주요 텔레비전에 방영됐다. 주요 언론들이 반핵시위를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다. 

911일을 마지막으로 ‘아마추어의 반란’이 주최하는 시위는 잠시 쉬게 되지만 그들의 활동지역인 고엔지 부근에서는 이후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두 번에 걸쳐 탈핵시위가 이루어졌다. 나아가 전국 각지, 이전에는 시위를 보기 힘들었던 지방 소도시에서도 중소 규모의 시위가 열리기 시작하였는데, 행사 직전에 트위터 등을 통해서 공지되는 것도 많아 그 전체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편, 20119월부터 경제산업성 앞에서 농성투쟁이 시작됐고 10월 말부터 거기에 후쿠시마 여성들이 합류했다(본지 창간준비 2호 참조). 이 농성장이 기존의 반핵시민운동단체, 후쿠시마와 오오이를 비롯한 핵발전소 현지 또는 예정지 주변 주민들, 새로 운동에 동참하게 된 시민과 사고 직후부터 시작된 도쿄전력 앞 항의행동, 올해 3월부터 시작된 총리관저 앞 항의행동 등의 교류 거점이 되었다.

핵발전소 재가동 추진에, 시민들은 강하게 반발

정부는 시민의 반발로 정기 점검 이후 다시 돌릴 수 없게 된 핵발전소를 재가동시키려고 작년부터 준비를 진행해 왔다. 오오이발전소 재가동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수도권반핵발전연합은 3월부터 매주 금요일에 총리관저 앞에서 재가동반대 항의행동을 진행해 왔다. 처음에는 참가자가 300명 정도였다. 그러나 재가동 결정이 임박함에 따라 참가자가 늘어 615일에는 1만 명을 넘었다. 일주일 뒤 22일에는 45000명. 또 일주일 뒤 6월 29일에는 15만~20만이나 되는 시민들이 트위터 등을 보고 자발적으로 모였다. 이에 호응해서 오사카의 간사이전력 본사 앞에서도 수천 명이 모이는 항의행동이 진행되었다.

71일 재가동 당일에는 오오이핵발전소 앞에 각지에서 시민 500명 정도가 모여 경찰에 밀리면서도, 밤새 항의를 계속했다. 비폭력 항의에 대한 경찰의 폭력은 인터넷 TV 생중계를 통해서 수만 명에게 알려졌고, 항의에 대한 공감과 경찰에 대한 분노를 트위터를 통해서 많은 시민들이 공유했다. 총리관저 앞에는 장마의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재가동 이후에도 매주 15만 명 정도가 결집했으며, 16일 ‘잘 가라 핵발전 10만 명 집회’에는 17만 명이 모였다. 도쿄의 큰 집회 모습은 작가 히로세 다카시 등이 모금을 제기해 헬리콥터를 사용한 인터넷 중계가 시작됐다.

항의행동 내부 문제제기와 새로운 혁명의 시대

그런데 관저 앞 항의행동의 진행방식에 대해 운동 내부에서 문제가 제기되었다. 새 참가자가 들어오기 쉽도록 한다는 이유로 경찰과의 마찰이 일어날 수 있는 행동을 스스로 규제하거나 재가동 반대 이외의 선전과 정치색 표출, 그리고 노조나 시민단체 깃발 휴대를 삼갈 것을 촉구하면서, 일장기 휴대는 실질적으로 허용하는 등이다.

그것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재가동 직전인 629일이다. 예상을 크게 넘는 사람들이 모인 것에 겁이 났는지 주최 측 한 사람이 경찰차량 위에서 참가자들에게 “10만 명 모였다고 재가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위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항의행동을 지속하기가 어렵다. 앞으로도 항의를 계속하기 위해서”라며 ‘해산’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경찰의 협박과 회유 가능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7월에 들어와 경찰의 규제도 강화되었으며, 그것 때문에 참가자가 관저 앞으로 다가갈 수 없어 포기하고 바로 귀가하기도 했다. 작년 4.10은 답답한 마음을 해방시켜 줬지만 최근 재가동에 대한 항의행동은 사람들의 불만과 분노를 더욱 쌓는 셈이다.

다만 최근의 참가 인원수는 주최 측이 이끌어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긴 했다. 아마미야 카린(작가, <주간금요일> 편집위원)는 "나는 지금 난생 처음으로 ‘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지금 일본 반핵운동은 큰 운동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주역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명으로도 꼼짝 않는 현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것인가'가 논의되는 속에서 경찰의 규제와 현 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을 다음 주역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발행일 : 201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