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시의 힘은 보고서나 산문이 전달할 수 없는 이미지와 감정의 단면들을 함축과 비유를 통해 전달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라. 시인이 포착하고 다듬어 배열해 낸 그 단면들은 읽는 이의 더 구체적인 상상을 끌어내며 실체와 공감하게 만든다. 핵에너지가 나쁘거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함께 느끼도록 하는 것은 사뭇 다른 의미가 있다. 핵에너지 문제를 대하는 채상근 시인의 태도와 바람이 바로 그런 것이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에 해당하는 『사람이나 꽃이냐』의 3부에 실려있는 일련의 ‘탈핵 시’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핵발전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틋함이다. 이들은 방사선을 다루는 일상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러나 불현듯 다가오는 황망스러운 상황에서도 평상성을 유지해야 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핵반응로(=원자로)의 고방사선 작업에 투입되었던 한 작업자가 “방사능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허겁지겁 뛰쳐나왔다/방호용 고무장화가 땀으로 가득 차고/잠깐 동안 두들겨 맞은 방사선이 얼마나 되는지 말할 수 없다고/울먹거리며 주저앉는다/앞을 볼 수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한/방사선 방호용 전면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다음 작업자들은/줄을 서서 기다리며/아우슈비츠의 가스 대학살을/연상하지 않으려고/애써 서성거린다.”(방사능시대·1996)
평범한 육체와 감정의 소유자이기도 한 이들은 우리 주변의 가까운 형으로 다가온다. 방사선을 허용 기준치 이상 두들겨 맞았다는 이유로 방사선 구역 출입 금지자가 된 형은 “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라면/방사선 피폭 허용선량 같은 것은/안중에도 없는 터였다”, 그리고 이 형은 “곧 방사선 과피폭 증세로/머리카락을 잃어버릴지는 몰라도/죽어,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에 묻힐지는 몰라도/퇴근 후 술집에선 출입 금지당하지 않고/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다.”(방사선 구역 출입 금지자)
하지만 그들은 보통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이고, 핵발전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위험성은 외면과 망각을 통해 타협에 이르곤 한다. “관광버스와 수학여행단은/원자력 전시관 앞에서 기웃거리지 않아도/대환영과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품에 안겨주는/원자력 발전소 홍보용 책자와 방문 기념품들은/그들이 두려워하던 핵폭탄과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의문과 질문을 가로막기에 충분하다.”(방사능시대·1995) 발전소만 잘 돌려주면 깨끗한 에너지와 함께 평생을 안심하고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득 싣고 집으로 돌아가고, 침묵이 최선의 방호가 되기 때문이다.
위험과 돈을 교환하며 지역사회가 갈라지는 것 또한 익숙한 풍경이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반대했던 군의회는/예산 심의 때가 되면 시끄럽다/원자력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금 더 받아야 한다고/발전소 추가 건설 중이니까 더 받아야 한다고/내 지역 우리 지역 더 달라고 싸움질이다.”(방사능시대·2006)
핵에너지와 사람의 단면들을 이토록 가깝게 그려낸 시인의 시선은 핵발전소 노동자로서 직접 일한 시인의 이력과 뗄 수 없는 관계일 것 같다. 그리하여 시인은 “덩치 커다란 원자로 설비들 옆에서 작업하는/노란 소인국 사람들”, 이곳에 작업복 주머니에 몰래 갖고 들어온 호박씨로 “해바라기만 한 호박꽃”이라도 피워볼 꿈을 꾸며(호박꽃 피어날 수 있을까), “이 글로 마음에 환한 불이 켜지고/세상만사 시름을 조금 덜어낼 수 있다면/당신과 나는 짜릿하게 감전된 것입니다.”(짜릿짜릿한 시)라고 말한다.
탈핵신문 제38호(2016.1월호)
김현우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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