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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오월의 봄, 2014

우리 모두가 밀양을 함께 살아간다면

밀양구술프로젝트, <밀양을 살다>, 오월의 봄, 2014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탈핵 희망버스에서, 밀양역에서, 부북과 상동과 산외와 단장의 산 위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짠하고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수십년을 살아온 집 앞뒤에, 난데없이 들어서게 된다는 고압송전탑을 10년 가까이 막아내고 있는 투사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건장한 경찰 한 손으로도 가뿐히 들릴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며, 새벽같이 산을 오르고 포크레인 아래에 기어들어가 며칠 밤을 새운 그 초인적인 영웅 할매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여기, 열다섯 편의 밀양 아리랑이 있다. 두 부부를 합쳐서 도합 열일곱 명의 이야기다. 어떤 이는 밀양의 어느 산골에서 났고 어떤 이는 부산 어느 언덕받이에서 자랐지만, 누구는 집안이 좀 살만했고 또 누구는 빚 갚고 자식 기르느라 허리 펼 새도 없었지만, 지금 이들의 삶은 이 한권의 책 속에 한데 모여 있다.

여름이라고 홍수가 지지도 않고 겨울이라도 가물지도 않은 햇볕 좋은 고장 밀양에서 큰 욕심 없이 살아가던, 서로 모르던 이들은 송전탑 저지 투쟁을 통해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터전이 다른 사람들과 이어져있고, 또 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송전탑 앞에서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시나브로 알게 된 것이다.

화악산을 비롯해서 밀양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해발 900미터 가까이나 된다. 1~2킬로미터 지척에 있는 마을끼리도 구불구불한 산자락에 가로막혀 볼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산등성이 움막에서 상봉했다. 사실 밀양의 투쟁은 이 이어짐을 거듭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밀양 주민들은 이 송전탑이 결국 동해안의 핵발전소와 이어짐을 이내 간파했고, 우리나라의 잘못된 중앙집중적 전력 수급정책과 이어짐을 깨달았고, 안면도와 굴업도, 부안과 삼척, 영덕의 투쟁과 자신들의 투쟁이 이어짐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이들의 발걸음이 강정과 쌍용차노조,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조로 이어지는 게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희망버스를 타고 온 연대시민들과의 만남으로 연결은 계속되었다. 한국전력은 송전탑을 이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밀양은 사람을 이었다.

밀양을 수시로 드나든 이들이 구술로 정리한 열다섯 편의 삶의 자락을 읽어가다 보면, 이 투사들의 정체가 하나 둘씩 벗겨진다. 그리고 그네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그렇게 투쟁을 이어온 이들은 유별나게 잘 나지도, 힘이 세거나 의지가 비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기뻐하고 슬퍼하고 회의하고 불안해하는 이들이었다. 며느리를 의지하고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매일매일 간신히 서로를 일떠세우는 이들이었다. 다만 어쩌면 조금 더 정직하고 조금 더 부지런한 차이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초인적인 영웅은 아니었다.

이 구술들이 밀양 싸움을 다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할테지만, 밀양을 함께 아파하고 탈핵을 함께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이 싸움과 사람들에게 좀 더 깊숙이 다가가기에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한국전력 사장과 직원들이야말로 이 책을 보면 좋겠다. 밀양의 투사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밟아 누르기 만만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고, 때문에 그렇게 막무가내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렇듯, 영웅이 아닌 인간이었기에 이들은 그렇게 싸워왔고 그것이 실은 이 싸움의 힘이었음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국전력도 경찰도 정부도, 이렇듯 밀양을 사는이들이 이 책 속의 사람들만도 아니고, 지금 밀양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밀양으로 끝날 것도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면 정말 좋겠다.

 

발행일 : 2014.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