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마피아가 실제 상황을 만났을 때
- 오시카 야스아키, 《멜트다운》, 양철북, 2013-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모두들 학교를 다닐 때는 수제였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시험을 낸다고 하면 예고한 범위 안에서 필사적으로 공부하면 100점을 땄겠지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범위를 벗어나면 0점이 되는 겁니다. 예상을 넘는 상황이 닥치면 전혀 대처할 수 없어요. 마라다메 위원장도, 보안원도, 도쿄전력도.” (104쪽)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일어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당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멜트다운》만한 책이 없겠다. 지은이 오스카 야스아키는 정부의 공식 발표 자료와 언론 보도 이면의 진실들에 접근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특히 그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 둘 드러나는 핵발전의 본질을 본다.
후쿠시마 제1원전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다름 아닌 전원 상실이었다. 몇십만 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는 핵발전소임에도, 비상 디젤발전기와 같이 자신을 식힐 수 있는 ‘외부’ 전원이 없으면 스스로 계속 타오르는 불을 어쩌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것이 핵발전소다. 지진과 쓰나미로 발전기는 물론 전력선마저 망가져버린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이 첨단의 기술로 만들어진 핵발전소를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원시적인 사람의 수작업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창고에 있는 기다란 고압 케이블을 200미터 정도 길이로 잘랐는데 직경이 10센터미터가 넘는 케이블은 무게가 1톤이 넘었다. 보통은 기계를 써서 며칠씩 하는 작업이었지만 기계를 돌릴 동력이 없었다. 당장 기댈 곳이라고는 오로지 40명 남짓한 원전 직원들의 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주차장에 가서 차량의 배터리를 떼어 모아왔고 전국 각지에서 소방차와 전원차가 수배되었다.
이런 상황은 후쿠시마 원전을 운영하는 도쿄전력도, 관할 부처인 경제산업성도, 그리고 당시의 총리인 간 나오토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러니 핵연료가 과연 녹아내리고 있는 것인지, 사용후핵연료가 안전한지, 수소폭발이 일어난 것인지,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TV만 쳐다보며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발전소 근처의 주민들이 언제 어떻게 피난해야 하는지도 주먹구구로 한 박자 늦게 정해지고 통보되었다.
그 동안 만들어 놓았던 사고대처 매뉴얼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 잘난 원자력 전문가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게 ‘예상에 없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진과 핵발전소는 시험문제 출제 범위를 지켜주지 않았다. 심지어 도쿄전력 시미즈 사장조차도 당시 도쿄가 아닌 나라현에 개인 여행중이었을뿐 아니라 실로 아무 것도 할 줄 몰랐다. 후쿠시마 원전의 현장을 책임진 요시다 소장만이 거의 본능적인 감각과 고집으로 해수를 주입하고 방사능 증기를 빼는 ‘벤트’를 실시하며 임기응변으로 상황에 대처해나갔다.
일차적인 수습을 책임져야 했던 간 총리는 사고 후 매일같이 ‘원자력 마피아’의 실체를 깨닫게 된다. 일본어로 원자력‘촌’이라 쓰는 원자력 마피아는 핵발전의 성장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도쿄전력 등 전력회사와 게이다렌 같은 기업 조직, 경제산업성 같은 정부 부처, 그리고 전력회사 노동조합과 이들이 배출한 국회의원 등 정치인과 언론인들까지 조밀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다.
간 나오토 총리는 원자력 마피아의 인의 장막에 막혀서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따로 조언자를 물색하고 도쿄전력을 기습 방문해서 도쿄전력이 도망치지 말 것과 공동대책상황실을 만들 것을 지시한다. 이 때부터 간 총리는 원자력 마피아 세력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괘씸한’ 존재가 되었고,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수습 지휘 권한을 둘러싼 과정이 첫 번째 힘겨루기였다면, 두 번째 힘겨루기는 사고의 보상 책임에 관한 것이었다. 도쿄전력 구제계획은 도쿄전력의 배상액 상한을 정해서 관련 기관과 회사들의 손해를 막아주도록 짜여졌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해관계자로 초청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돈줄은 ‘국채’라는 국민의 지갑이었고 그 계산서를 받은 사람들은 원전의 방사능 오염에 노출된 사람들, 특히 차세대를 담당할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었다. 그럼에도 간 총리는 사고 수습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더 이상 도쿄전력을 추궁하기 어려웠다.
세 번째 힘겨루기는 핵발전을 포함하는 일본 에너지 정책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간 총리는 이 기회에 재생에너지 확충과 에너지 절약 등으로 국가에너지 계획의 틀거리를 완전히 바꿀 결단을 내리고자 했지만 곳곳에서 방해에 가로막혔다. 원자력 마피아들은 지진 위험이 높은 하마오카 원전만을 중단시키는 것으로 원자력 업계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고, 언론을 동원해서 짜고치기 홍보전을 펼쳤다. 경제산업성은 플루서멀 같은 기술과 원자력 기술 혁신의 근원인 핵연료 사이클을 단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간 총리가 외국 회의에 나가 있는 동안 간 총리를 마구 흔들어댔다. 결과는 원자력 마피아의 승리였다. 간 총리 내각은 후쿠시마 사고의 초기 수습과 재생에너지 지원 법안을 만드는 것까지를 임무로 확인하고, 8월 30일 총 사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후쿠시마 사고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위험하게 허물어져있는 구조물 사이에서 핵연료를 꺼내는 일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그 사이에 큰 지진이라도 나면 다시 막대한 방사능 누출과 재임계 상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일본 내각을 이끌고 있는 것은 간 총리를 흔들어 끌어내렸던 장본인 중 한 사람인 아베 신조 총리다.
오시카 야스아키의 생생한 기록들을 읽으면서 절실하게 든 생각 중 하나는 한국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업계와 정부 부처들에 포진한 소위 자칭 원자력 전문가들의 폐쇄된 공동체는 한국 전력정책의 고삐를 놓을 생각이 없다. 막대한 자금줄을 동원하며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구워삶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사고가 닥쳤을 때, 이들이 실제로 어떤 수습의 기술도 발휘할 수 없으리라는 암울한 예상마저 그렇다. 고리, 월성의 노후 핵발전소와 물이 펑펑 쏟아지는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에 대한 수습 방안을 내놓지도 못하고,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건설을 위해 막무가내 폭력을 멈출 줄도 모르고, 제어케이블 위조 검증 같은 각종 비리 앞에서 스스로의 앞가림도 못하는 것이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다.
일본처럼 침몰하지 않으려면, 언젠가 일어날 핵 사고 이전에 한국 원자력 마피아의 권력부터 해체시켜야 할 것이다.
발행일 : 201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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