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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기사, 핵폐기물

<11호>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에서 경주 주민투표까지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에서 경주 주민투표까지

이헌석 편집위원(에너지정의행동 대표)


사용후핵연료

한국 반핵운동 역사 중 70% 이상은 핵폐기장 반대운동 역사일 정도로 핵폐기장 건설을 둘러싼 우리 사회 갈등은 컸다. 더구나 200412, ·저준위 핵폐기장과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핵폐기장은 중·저준위뿐만 아니라, 고준위핵폐기물(사용후핵연료)까지 처분하는 시설을 의미했다. 그간 있었던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통해 실패를 연속했던 정부의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을 지난 9(20136월호)에 이어 살펴본다.

굴업도 실패 이후 실패를 반복한 핵폐기장 정책

1994년 인천 옹진군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하려고 했던 계획이 활성단층 발견으로 무산된 이후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 계획은 말그대로 원점으로 돌아가고, 이후 사업추진 주체가 바뀌게 된다. 19961,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핵폐기장 사업주체를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한국전력공사로 이관할 것을 지시했다. 사실상 그간 사업의 책임을 묻는 문책성 지시였다. 이에 따라 담당부서도 과학기술처에서 통상산업부로 바뀌고 한국원자력연구소의 관련 인력은 한국전력공사로 옮겨와 원자력환경기술원이 신설된다.

하지만 김영삼정부에서는 더 이상 관련 사업이 진행되지 못하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새로 정비된 방사성관리대책에 따라 2000년 지자체 공모를 추진했으나, 응모하는 지자체가 없음에 따라 계획이 무산되었다. 정부는 또다시 계획을 바꿔 사업자가 후보지를 선정한 다음 지자체와 협의를 통해 부지를 선정하는 방식을 추진한다. 이 계획에 따라 과거 진행한 바 있는 임해지역을 중심으로 47개 시·군과 244개 읍·면을 대상으로 후보지를 선정하는 과정을 다시 반복한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임기를 채 한달도 남기지 않은 200324일 원자력위원회는 영광, 울진, 영덕, 고창 등 4개 지역을 최종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이 계획이 추진되자, 4개 지역주민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4개 지역주민들과 시민사회단체가 핵폐기장 백지화와 핵발전 추방을 위한 반핵국민행동을 결성하고 각 지역과 서울에서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청와대 앞 36일 단식농성 등 어느 때보다 수위 높은 투쟁으로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반대했다. 전국적으로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확산되자, 정부는 627일 기존 4개 지역이외에도 타지역의 유치신청을 715일까지 받고, 부지조사에서 적합한 지역이 새롭게 나올 경우, 그 지역을 우선 선정하는 등 세부 계획을 다시 발표한다. 이 계획은 이미 4개 지역의 반대가 확산된 상태에서 군산, 부안, 장흥 등 신규 신청을 염두에 두고 있는 지자체를 고려한 계획이었다.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

<부안 총파업 결의대회(2003813), 사진 제공 이헌석>

이러한 가운데 핵폐기장 유치에 앞장선 곳은 부안군이었다.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는 군산시장의 유치포기 선언 다음 날인 711, ‘방사성폐기물 관리센터 및 양성자가속기 사업 부안군 유치를 선언한다. 이후 부안군의회는 7:5로 부안군 유치신청을 부결시켰지만, 군수는 유치신청 마감을 하루 앞둔 714일 유치신청서를 접수한다.

부안군수의 독단적인 유치신청이 있자, 부안군민들은 분노한다. 722일 부안군민 1만명 집회를 비롯해 724일 부지선정위원회의 최종선정발표가 있자, 26일 또다시 1만명 집회가 열리는 등 부안군민들의 반대운동은 거셌다. 당시 부안읍 인구가 25천명 수준임을 고려하면 짧은 기간 동안에 부안의 열기는 뜨거웠다. 반복되는 집회와 경찰의 강경진압 등으로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103일 당시 고건 총리와 지역대표단은 부안지역 현안 해결을 위한 공동협의회 구성에 합의한다. 이후 계속 진행된 공동협의회에서 주민투표 방안이 검토되고 즉각 백지화연내 주민투표 실시를 둘러싼 오랜 논의가 반대대책위 내부에서 진행된다.

오랜 검토 끝에 결국 1116일 반대대책위는 연내 실시를 전재로 주민투표안을 수용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반응은 너무나 싸늘했다. ‘연내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주민투표법안이 국회 계류 중이며, 행정절차에 필요한 시간과 얼마 남지 않은 총선 등으로 인해 연내 실시안을 거부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부안공동협의회는 결렬상태에 빠지게 된다.

대화가 결렬되자, 협상기간 동안 평화롭던 부안이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1117~20일은 거의 매일 수십명의 지역주민들이 경찰들과의 충돌과정에서 부상당하고, 예술회관, 청소차량 등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다시 국면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부는 대화에 나서거나 해결방안을 모색하지 않았고, 부안에는 최대 12천명의 경찰이 상주하면서 지역주민들과 경찰의 충돌, 부상은 어찌보면 예상되었던 사태였다.

12, 정부가 새로운 주민투표 절차와 보상방안 등을 제시하지만, 주민투표의 실시 방법, 시기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자, 결국 반대대책위는 주민투표일로 잡고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학계 등이 중심이 되는 주민투표관리위원회를 구성해 줄 것을 요청하고 주민투표일로 2004214일을 발표한다. 정부는 주민투표 법적 효력 없음을 발표하고, 유치대책위는 주민투표 시행금지 가처분 소송 등을 진행하나, 소송은 기각되고 예정대로 부안 주민투표는 진행되어 총 유권자 52,108명 중 72.04%37,540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이중 91.83%34,472명이 유치 반대에 투표함에 따라 부안 핵폐기장 문제는 사실상 종결하게 된다.

부안의 성과와 경주 주민투표의 부정

<영덕군 공무원들이 달고 다닌 리본과 포항시청앞에 걸린 플랭카드. 플랭카드에는 찬성측 주장인 정부지원내역이 크게 씌여있다. 주민투표운동에서 공무원은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국책사업 홍보라는 이름으로 공무원들이 직간접적으로 주민투표에 참여했다 반핵국민행동>

 

부안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비민주적으로 진행되었던 핵폐기장 선정과정을 부안주민들이 막고, 주민자치 역량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지역주민들의 자치 역량을 총동원하여 주민투표를 직접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클 것이다.

한편 주민투표를 통한 핵폐기장 찬반을 묻는 과정은 이후 핵폐기장 선정과정에 중요한 선례가 되어, 이후 2005년 주민투표의 근거가 된다. 200412, 정부는 253차 원자력위원회를 열고, ·저준위 핵폐기장과 고준위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분리하고, ·저준위 핵폐기장 건설을 위해 주민투표를 도입하는 방안을 발표한다. 또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중·저준위 핵폐기장 유치지역 지원을 법률로 지정하고, ·저준위 핵폐기장 건설 지역에 고준위 핵폐기장을 건설하지 않도록 법제화한다.

이에 따라 20056, 정부는 3천억원 지원과 양성자가속기, 한수원 본사 이전 등 지원책과 915일까지 주민투표 실시를 요청하는 일련의 계획을 발표한다. 부안 핵폐기장을 백지화로 이끌었던 주민투표를 오히려 핵폐기장 지역 선정의 방법으로 본격 활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삼척, 울진을 포함해서 6개 지역이 주민투표 참여의사를 밝혔으나, 지자체 의회 동의를 얻지 못한 이 두 지역은 탈락하고, 결국 경주, 군산, 영덕, 포항에서 주민투표 진행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주민자치에 의해 진행되었던 부안 주민투표와 달리 관주도의 주민투표는 말 그대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첫번째로 일어난 것은 사전투표운동 논란이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주민투표법에 따라 주민투표가 실시될 것으로 객관적으로 예상되는 시기에 벌어지는 사전주민투표운동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이미 6월말부터 지자체에서는 유치 신청을 마치고 각종 투표운동에 돌입했지만, 아직 부지선정위원회의 부지적합 판정이 내려지지 않았으니, 주민투표를 할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선거관리위원회의 입장이었다. 이것이 명확해지려면, 915일이 되어야 한다는 답변이었다. 이 기간동안 주민투표가 예상되는 모든 지역에선 다양한 방법의 사전투표운동이 진행되었다. 설명회장에선 수건, 저금통, 연필꽂이 등 다양한 기념품이 전달되었고, 핵발전소 견학을 이유로 온천여행이 지역주민들에게 제공되었다. 일부지역에선 후보지 인근주민들에게 현금을 돌리는 일까지 벌어졌지만, 이 모든 것은 합법이었다.

또한 국책사업 시행에 따른 주민투표라는 특성상 지자체 공무원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형식상으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찬성측 단체 1개와 반대측 단체 1개를 만들어 찬반 양측이 각자 주민투표 찬반운동을 벌이는 것이지만, 공무원들은 예외였다. 각 지자체의 공무원들이 총동원되는 것은 물론 국책사업을 홍보한다는 이유로 이장, 반장, 통장 등 관련 조직들까지 나서서 유치운동을 벌였다. 군산의 원자력을 바로 알고 사랑하는 공무원 모임’, 영덕의 농촌지도소 관계자에게 식사제공, 경주의 통장 대책회의 등 모든 것이 묵인되었다.

공무원 투표운동 개입의 절정은 부재자신고에서 나타났다. 원래 부재자 투표는 선원, 군인 등 특수한 상황에서 투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제도이다. 매년 2~3% 정도의 유권자가 이 제도를 이용했으나, 집에서 우편으로 투표를 할 수 있는 거소(居所)투표 제도를 접목시켜 군산 39.4%, 경주 38.1%의 유권자가 부재자 신고를 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투표율이 1/3이 되지 않을 경우 주민투표는 무효화되고 개표는 진행되지 않지만, 이미 투표일 이전에 투표률이 1/3을 넘어서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관권, 금권 선거 논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주민투표는 진행되었다. 결국 개표 결과는 경주 89.5%4개 지역 중 찬성률이 가장 높은 것으로 확인됐고, 경주가 중·저준위 핵폐기장 부지로 최종 확정되었다.

부안의 주민투표와 경주 등 4개 지역의 주민투표는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비교점을 갖는다. 전국적 사안이며 수백년이상 유지되어야 할 중·저준위 핵폐기장 건설을 단지 해당 지역주민들만의 찬반으로 결정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은 주민투표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이 남아 있는 숙제이다. 또한 주민투표 당시 핵폐기장의 처분 방식(천층, 지층)이나 안전성 등 가장 기본적인 내용도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지원금 여부만을 갖고 찬반을 묻는 절차 역시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절차적 민주주의로 나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함께 남겼다.

 

 

 

 

발행일 : 201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