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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책 소개] 그리드, 탈핵운동의 익숙한 듯 낯선 과제

∥ 책 소개

그리드, 탈핵운동의 익숙한 듯 낯선 과제

 

- 글쓴이: 홍덕화 충북대 사회학과 교수

 

 

 

경주 나아리에서 홍천군청 앞 천막농성장까지, 전기는 여전히 눈물을 타고 흐른다. 전력망은 핵발전의 필수 요소이자 탈핵을 탈송전탑, 탈석탄과 연결해주는 현실적 토대다. 달리 말하면, 전력망은 탈핵운동의 확장을 모색할 수 있는 출발점이자 탈핵운동이 넘어야 할 장벽이다.

 

 

탈핵운동이 초고압송전탑 너머 전력망으로 나아갈 필요성은 에너지전환이 추진되면서 더 커지고 있다. 간간이 들리는 태양광발전량 증가로 인한 핵발전소 출력 감발 소식은 앞으로 닥칠 일들을 보여주는 예고편과 같다. 매 순간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고 주파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하는 전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간헐성이라는 난점을 가진 재생에너지와 유연성이 가장 떨어지는 핵발전은 장기적으로 하나의 전력망에서 공존할 수 없다. 전력망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리드』(그레천 바크 지음, 김선교·전현우·최준영 옮김, 동아시아, 2021.6)

 

그리드는 전력망의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출발점을 제공한다. 핵발전이 아닌 전력망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책을 펼칠 것인지 고민된다면, 다음의 사항을 고려해봄 직하다. 먼저 그리드는 기술 너머의 정치경제적 변화를 파고든다. 예컨대, 200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 사태의 배경을 추적하기 위해 이 책은 정전을 촉발한 직접적인 요인과 함께 규제 완화, 기업 경영전략의 변화, 장거리 전력거래시장의 활성화를 두루 살펴본다. 전력산업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지 않았다면, 송전망 투자가 크게 줄지 않았을뿐더러 수익 추구를 위한 장거리 송전도 줄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작은 사고가 대규모 정전으로 이어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전력망에는 항상 기술과 법, 정치와 경제가 뒤엉켜있다.

 

다음으로 그리드는 다채로운 사례를 통해 전력망의 변화를 추적한다. 전력망을 둘러싼 쟁점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면, 이 책에 제시된 사례들이 문제에 다가가는 입구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가령 2010년대 회복력과 마이크로그리드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유가 궁금하다면, 기후재난과 블랙아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맥락을 따라갈 수 있다. 그러면 다중 방호가 아닌 전력망 자체의 재설계가 화두로 부상한 배경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전력회사의 수익 극대화 전략과 감시·통제에 대한 소비자의 우려 사이에서 스마트미터기나 스마트그리드가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드는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진다. 무엇보다 미국의 전력산업을 사례로 하고 있기에 국내 상황과 거리가 있는 지점이 적지 않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에너지전환을 가속하기 위해 한국의 전력산업과 전력망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전력산업 사유화의 길을 손쉽게 택할 것이 아니라면, 고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에너지 민주주의나 에너지 공공성에 입각한 방안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송배전망이 모호한 쟁점으로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 가상발전소, 에너지저장장치, V2G(Vehicle to Grid) 등 새로운 논의들까지 덧붙이면 전력망은 더 까다로운 문제가 된다. 단적으로 전기자동차를 매개로 한 V2G 실증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만큼 사적으로 소유한 저장장치를 공적으로 소유·관리되는 전력망과 결합하는 것은 곧 닥칠 미래다. 그러나 시장화된 모델 이외의 답은 아직 묘연하다. 그렇게 그리드가 그리고 있는 다층적인 변화는 숱한 질문을 던진다.

 

인프라(infrasture)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고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인프라의 존재를 눈치챈다는 것은 기존 인프라가 저항에 직면해서 변화의 경계에 서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탈핵운동은 전력망이라는 인프라를 눈에 보이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초고압송전탑 너머 전력망 전체에 대한 구상은 아직 흐릿하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모호하게 남겨진 공간에 윤곽을 그리고 탈핵운동의 색깔을 입히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탈핵신문 2021년 10월(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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