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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핵평화, 해외

기후캠프 한 세대 전, ‘벤트란트 자유공화국’

세계 곳곳에서 기후행동이 분출하는 가운데, 특히 스웨덴에서 툰베리가 점화한 학생 기후파업과 영국에서 시작한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그리고 독일의 엔데 겔랜데(Ende Gelände)의 인상적인 활동은 다른 나라의 운동까지 고무하고 있다. 독일의 반핵+반석탄발전 조직인 엔데 겔랜데의 이름은 마지막 부지또는 여기에서 더는 안 돼정도의 뜻이다. 2015년부터 매년 3~4천 명의 활동가가 모여서 기후캠프를 진행하고, 노천 석탄광산을 점거하여 채굴을 막는 직접행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운동들이 압력이 되어 독일은 핵발전 퇴출뿐 아니라 2038년까지 석탄발전 중단을 결정하게 되었다.


 

1980년 벤트란트 자유공화국

 


△ 2019년 엔데 겔랜데의 기후캠프




그런데 엔데 겔랜데와 같은 행동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다. 독일에서 1970년대부터 쌓아온 반핵운동의 경험과 전통이 있었고, 엔데 겔랜데의 활동 방식과 문화 그리고 인적 구성은 몇십 년 전 반핵 환경운동과 상당한 교집합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고어레벤 핵폐기물 반대 투쟁의 출발이 된 1980년의 기억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떠올려봄직도 하다.


벤트란트 자유공화국’(Republik Freies Wendland)은 서독 고어레벤 지역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존재했던 저항 캠프의 이름이다. 1979년에 독일의 연방기술연구소는 방사성폐기물 저장공간으로 적절성을 조사하기 위해 이 지역 암염지대를 굴착하기 시작했다. 1002공구와 1003공구를 소수의 지역 활동가들이 점거했지만 실패했고, 보다 큰 행동 계획이 논의되었다. 198053행동의 날5천여 명의 반핵 활동가들이 고어레벤과 트레벨 마을 사이의 1004 굴착 예정 공구로 진입했고, 핵폐기물 저장을 위한 추가 굴착에 반대하는 점거를 시작했다. 곧 이 점거지는 벤트란트 자유공화국이라는 독립 국가임이 선포되었다. 물론 지역 당국은 즉시 이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시위대는 여기에 며칠 동안 나무와 진흙으로 110개 정도의 오두막을 지었고, 여기에는 100명이 모일 수 있는 우애의 집, 온실, 의무실, 미용실, 쓰레기 처리장 같은 건물도 있었다. 풍력 우물과 태양열 온수를 활용한 사우나실까지 있었다. 이 공화국으로 들어가려면 반핵 깃발 아래의 대나무 장벽 국경 검문소를 지나야 했고, 10마르크의 인지세를 내면 벤트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공화국에는 젊은 사회주의자 조직의 리더였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를 위시하여 음악가, 문인, 수천 명의 외부 방문객들이 모여들었고, 강의와 토론을 비롯해 록 콘서트와 인형극이 벌어졌다. 518일에는 점거지 타워에서 소출력 해적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역시 독일 연방정부는 이 불온한 공동체를 오래 묵인하지 않았다. 64일 아침, 자유공화국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명령 아래 니더작센 경찰과 국경수비대, 중장비에 의해 진압되었다. 35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고, 끝까지 중앙광장에 남아 비폭력 연좌를 벌이던 2000여 명의 점거자들은 갖가지 법규 위반을 이유로 쫓겨났다. 해적 라디오는 이 상황을 하루종일 보도했고, 오두막이 모두 철거되고 철조망이 둘러쳐진 후 작전은 종료되었다.


자유공화국의 한 달이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투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분노한 평화행진이 같은 날 독일 25개 이상의 도시에서 벌어졌다. 15천여 명이 행진한 베를린에서 벤트란트에서 온 활동가는 투쟁을 계속하자고 호소했다. 많은 활동가가 고어레벤 지역에 남았고, 이후 매년 핵폐기물 수송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지역 농민과 전국에서 모여든 활동가들은 완강하고 창의적인 저지 운동을 이어갔다(이 투쟁은 2020년 부산반핵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캐스터를 멈춰라에 잘 담겨있다). 자유공화국은 지역 풀뿌리 반핵 조직으로 이어졌고 평범한 독일 시민들의 상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벤트란트(Wendland)는 독일 에너지전환(Energiewende)의 한 씨앗이 뿌려진, 전환의 땅이 되었다.


김현우 편집위원 

탈핵신문 2020년 8월(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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