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 때에』, 레이먼드 브릭스, 시공주니어, 1995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아저씨』, 『곰』 등의 그림책으로 친숙한 유명한 영국 작가다. 그의 『바람이 불 때에』는 1982년에 처음 출간되었는데, 한국어로는 1995년에 초판이 나왔고 작년에 벌써 41쇄를 찍었다. ‘세계의 걸작 그림책’이라는 홍보문구를 달고 있는 만화 형식의 그림책이지만 과연 어린이들이 읽어도 좋을까 싶을 정도로 무섭고 슬픈 내용을 담고 있다.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서 은퇴 후의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던 노부부는 갑자기 분주해진다. 핵전쟁 발발을 예고하는 라디오 방송을 심각하게 들은 할아버지가 정부에서 나눠준 전시대비 지침서에 따라 방공호를 짓고 각종 비상물품을 준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식수를 받아두고 창문을 희게 칠하는가 하면 열나흘간을 버틸 식량을 비축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핵전쟁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경험했던 2차 대전을 떠올리며 총력전에 국민이 함께 할 바를 생각하고 정부와 군대의 대응을 예상할 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규 방송이 중단되면서, 적의 미사일이 발사되었으며 3분 뒤에 폭발할 거라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나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끌고 황급히 집안의 대피소로 몸을 피하고, 이 책에서는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 두 페이지가 지나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부는 다행히 무사했다. 그러나 집 바깥은 열과 충격으로 인해 온통 부서지고 흐트러진 다음이다. 전기와 수도가 끊겼기 때문에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켜지지 않는다. 어쩌면 방송을 내보낼 사람들까지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이웃의 생사도 알 수 없고 우유와 편지도 배달되지 않는다. 며칠을 집에서 비상식량을 먹으며 버티던 부부는 집 바깥으로 나가본다. 풀도 나무도 말라버렸지만 햇볕은 밝게 내리쬐고 사방은 고요하다. 비가 내리자 식수를 보충하려 빗물도 모아둔다.
이런 상황에서도 위트와 희망을 잃지 않던 부부는 그러나 조금씩 아프기 시작한다. 구토와 설사를 하고 몸에서 힘이 빠지고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잇몸에서 피가 나는 것이다. 짐작하겠지만, 히로시마 핵폭발 이후의 원자병과 같은 증세다. 부부가 기대했던 정부의 대응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구조대도 적군도 오지 않는다. 그 대신 다가온 것은 냄새도 소리도 없는 방사능 낙진이다. 높은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그들이 이 상황을 만든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력이 쇠한 부부는 마지막 기도와 함께 잠이 든다. 그림책은 그렇게 먹먹하게 끝난다.
너무 먼,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이 그려진 1982년은 동서 진영간의 냉전이 대륙간 탄도탄 배치 경쟁으로 전개되면서 핵전쟁의 공포가 일반인들에게도 가까이 다가온 때였다. 영국의 좌파 역사학자 E. P. 톰슨은 영국 지식인은 핵무기 경쟁을 인류 문명의 최후단계를 의미할 ‘절멸주의’라고 고발하며 ‘핵무장해제캠페인(CND)’을 이끌었다. 정치인들의 의도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가 증식하는 고유의 메커니즘을 갖는 거대 기술 체제가 절멸주의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이후 다행히 미·소 군축이 시작되었고, 또한 너무도 다행스럽게도 북핵 위기도 일단 한 고비를 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위협들과 우리의 거리는 멀지 않았고 지금도 결코 영영 멀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 핵폭탄과 방사능에 대해 알 기회가 없었고 국방과 에너지 정책에 관여할 기회조차 없었을 영국의 노부부의 가슴 아픈 이야기는 그림책으로만 남아야 하겠지만, 그 아픔을 공감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권하고 싶은 책이다.
탈핵신문 2018년 4월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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