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사사키 아타루 지음, 김소운 옮김, 여문책, 2017
이 책은 본격적인 탈핵도서는 아니다. 핵발전 문제를 다루는 게 핵심도 아니고 관련 분량도 많지는 않다. 그러나 일본의 ‘인기’ 소장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의 성찰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부여잡고 있던 ‘근거’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지진과 핵발전에 대해서 심각한 이야기를 던진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과 『이 치열한 무력을-본디 철학이란 무엇입니까?』(자음과모음, 2013) 같은 저작들로 한국에도 상당히 알려진 저자의 이야기는 『사상으로서의 3.11』(그린비, 2012)에도 실린 적이 있다. 제목 그대로 3·11 후쿠시마 사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이다.
우선 저자는 핵발전소 사고와 지진은 둘 다 미증유의 사태, 즉 ‘디 온리 원(the only one)’의 사태이지만, 그 사태가 곧 ‘원 오브 뎀(one of them)’임을 음미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직접적인 피해자들에게 그 경험은 둘도 없는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존중되어야 하고 어루만져져야 한다. 이 사태를 두고 통계 수치를 들이대거나 일반론으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수많은 참화 중 하나라는 냉정한 시선도 확보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의 안녕도 지킬 수 있고 보다 보편적인 가치와 대안을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에서 핵발전으로 고통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의 경험은 ‘디 온리 원’이다. 그러나 이는 ‘원 오브 뎀’의 인식과 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공동의 과제를 제시하기도 한다.
저자가 ‘계몽의 빛’이 실로 야만적인 학살을 초래하는 ‘핵의 빛’을 창조하고 말았다는 역설을 말하는 대목은 흥미롭게 읽힌다. 1755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진도 8.7로 추정되는 대지진이 일어나서 6만 명이 죽는 일이 있었다. 지진이 일어난 날은 하필이면 성인을 기리는 기독교 대축일이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신을 섬긴 성인들을 모시는 날에 신의 벌을 받았다는 사실에 18세기의 지식인들은 동요했고 신학자들은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볼테르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은 신학을 통렬히 비판했고 인간의 이성이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낳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결국 핵무기와 핵발전 이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한다고 하지만 핵에너지에 수반되는 끊이지 않는 사고와 잠재적 위험을 사사키 아타루는 상기시킨다. 그리고 핵의 빛은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라는 악몽으로 다가왔다. 물론 저자는 계몽의 프로젝트가 대지진으로 시작해서 대지진으로 끝났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과장되고 안이하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었던 근거를 의심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장도 아니고 안이한 것도 아니다.
‘근거’, 독일어로 ‘그룬트(Grund)’ 영어로는 ‘그라운드(ground)’라는 단어는 대지 또는 토지와 같은 의미다. 저자는 리스본 대지진으로 그룬트가 동요해버렸으며, 그것은 세계의 근거와 이 세계를 관장하는 이성이자 이유가 흔들린 것과 다름없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는 치열한 부정과 냉정한 회의를 통해, 허무가 아닌 긍정을 답으로 제시한다. 지금 여기서 바스러진 대지, 즉 근거를 새롭게 만드는 것 말이다. 아무리 더럽혀졌을지라도 살 수 있는 근거를 새로이 발견하기 위해, 이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만든다는 생각이다.
연이은 지진으로 경주, 포항의 시민들도, 한국의 우리 모두도 대지가 흔들리는 것과 함께 우리 생각의 근거가 흔들린 경험을 했던 게 아닐까? 언제까지든 안전할 수 있으리라는 핵발전 신화가 뿌리에서 흔들린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의 장소’를 만들 것인가?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부소장,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탈핵신문 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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