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명령』, 헤르만 셰어 지음, 모명숙 옮김, 고즈윈, 2012
지난 신고리5·6호기 공론화 과정에서 찬핵진영 또는 핵산업계에서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논리를 하나 들고 나왔고, 또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말하자면 핵발전과 재생가능에너지는 상충 관계가 아니며, 지금 한국은 재생가능에너지 보급 여건과 기술이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 핵발전이 수익을 내서 재생가능에너지를 지원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핵발전이 고생하며 집안에 돈을 벌어다 주는 ‘큰아들’이고 재생가능에너지는 이제 사회에 진출하는 막내이기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인데, 실제로도 그러할까?
2010년에 작고한 독일의 학자이자 에너지 정치가 헤르만 셰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분명한 이야기를 이 책으로 남겼다. 심지어 재생가능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은 ‘명령’이다. 이 책의 제목에 쓰인 ‘명령’은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定言命令)’, 즉 “너의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통할 수 있게 행동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에너지 전환을 정언명령에 비유한 것은, 현실에서 그것이 결코 쉽지 않으며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비타협적 투쟁을 요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녹색’과 ‘에코’라는 표현들이 범람하면서 누구나 에너지 전환에 동의한다고 하고, 재생가능에너지의 미덕을 칭송한다. 재생가능에너지 보급을 위해 전기요금을 올리거나 세금을 투입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론조사는 찬성이 더 많다. 역으로 핵산업의 핵심에 있는 한수원이나 두산중공업 같은 기업들도 재생가능에너지 확대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헤르만 셰어는 이러한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오히려 본격적인 갈등이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실은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동의는 거짓 합의다. 왜냐하면 이미 기반을 잡은 에너지 공급 세력은 기껏해야 핵·화석 에너지가 재생가능에너지와 공존하는 것을 노리며, 또 핵·화석 에너지의 비중을 가능한 한 크게 하며, 재생가능에너지가 전통적인 에너지 공급의 구조에 적응하고 또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제한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핵·화석 에너지 진영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유예 전략이 있다. 하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이용가능하다고 추정되는 재생가능에너지로 가는 ‘다리’ 또는 재생가능에너지와 같은 효과를 갖는다고 여겨지는 대안들, 즉 핵에너지의 ‘르네상스’(요즘 같으면 스마트원자로)와 CCS(탄소포집저장)를 이용한 ‘기후친화적 화력발전소’ 같은 것들을 선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재생가능에너지를 위한 대형 프로젝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실현하는데 많은 시간을 요하고 주로 대형 투자자들과 많은 나라들의 협의를 통해서만 가능한 프로젝트들로, 사하라 사막과 근동의 풍력 및 태양열 발전소로부터 유럽 국가들에 전기를 보낸다는 ‘데저택’ 프로젝트와 북해의 풍력 단지를 유사하게 연결시키는 ‘시텍’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셰어는 이러한 유예 전략들이 재생가능에너지의 여러 가능성들이 희박한 것으로 인식되게 하고, 핵·화석 에너지 산업도 에너지 전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착시를 유도하면서, 대규모 에너지 기획이 갖는 뻔히 예견되는 복잡한 현실의 난관을 핑계로 실제의 에너지 전환을 가로막게 만든다고 질타한다.
재생가능에너지의 ‘간헐성’과 ‘불안정성’을 부각시키고 핵에너지의 ‘경직성’과 ‘비효율성’을 은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거짓된 에너지 합의를 주장하는 논리는 이제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재생가능에너지 체제와 핵에너지 체제는 정치적으로도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내 더욱 확연해질 것이다. 재생가능에너지는 핵산업의 막내 동생이 아니라 다른 에너지 집안의 피가 흐르는 존재다.
탈핵신문 제59호 (2017년 12월호)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부소장, 인문사회서점 레드북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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