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정 논의 시작 후, 5년만에 타결
지난 4월 22일 한·미 양국은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에 가서명했다. 2010년 개정 논의를 시작한 지 약 5년만에 협정개정이 타결된 것이다. 다음날 일부 진보언론을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기사와 사설을 통해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의 족쇄를 풀었다’, ‘향후 핵발전소 수출에 청신호가 켜졌다’며 일제히 환영했다.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계기로 제2원자력연구원은 반드시 경북에 설립되어야 한다”며 이후 개발사업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내비치기도 했다.
우라늄농축과 핵연료재처리, 기존 ‘미국 동의’에서 ‘고위급 회의’로 바뀐 수준
하지만, 이번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내용이 정말 족쇄를 푼 것인가. 그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를 반드시 해야 하나. 이런 기본적인 물음에 답하는 이들을 찾기는 힘들었다.
외교부가 4월 22일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가서명된 한·미원자력협정 가서명 내용이 요약되어 있을 뿐 원문은 실려 있지 않다. 비공개 상태에서 배포된 보도자료만 보더라도, 이번 한·미원자력협정은 이전과 비교했을 때 큰 틀의 변화는 없다. 외교부는 쟁점이었던 파이로프로세싱(pyroprocessing,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로 건식재처리를 뜻함, 편집자 주)과 우라늄 농축에 대해 ‘추진 경로(고위급 회의)’를 마련했다고 밝히고 있다. 기존 한·미원자력협정에는 고위급 회의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 개정을 통해 고위급회의가 신설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일부 언론 보도처럼 우라늄 농축과 핵재처리를 미국이 승인한 것인가?
보도자료 어디에도 이를 미국이 승인했다는 내용은 없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를 논의하기 위한 ‘틀(고위급회의)’을 마련한 것에 불과하다. 기존 원자력협정에는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문구가, ‘고위급 회의에서 논의한다’로 바뀐 것이다.
파이로프로세싱에 관련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이전부터 한·미 양국이 파이로프로세싱에 대해 10년간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합의된 상태였다. 그간 발목을 잡아왔다는 사용후핵연료의 ‘조사후시험’과 ‘전해환원’ 같은 연구과정도 과거에 아예 못했던 것이 아니라, 수년 단위로 동의를 구해왔던 것이 20년 단위로 동의 기간이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연구자들 입장에서 보면 귀찮은 일하나가 줄어든 것이겠지만, 이것이 대부분의 언론이 ‘환영’ 사설을 쓸만큼 큰 일인지는 의문이다.
정말, 우라늄농축과 핵연료 재처리 필요한가?
더 큰 문제는 정말 우리나라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해야하는가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있다. 그간 우리나라 핵발전소에서 사용하고 있는 핵연료는 모두 수입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현재 국제 우라늄 보유고는 부족한 상태가 아니고,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해체 후 남은 핵연료로 인해 농축 우라늄이 넘치는 상황이다. 심지어 미국의 대형 농축우라늄 업체인 ‘유섹’은 2014년 국제 농축우라늄 가격하락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수요 감소로 파산을 신청하기도 했다.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이 1970년대 미국에서 연구 중단된 것도 경제성 문제였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할지라도 우라늄 가격이 낮은 상황에서 굳이 재처리한 우라늄을 사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지에 대해서는 관련 핵공학자들 조차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경제성이 떨어지는데도 왜 핵연료 농축과 재처리를 하려고 하는 걸까? 소위 ‘핵주권론’이라 불리는 일련의 주장에 대해 핵무장을 염두에 둔 포석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외견상 평화적 이용과 상업용 발전을 근거로 들지만, 유사시 이를 핵무장으로 연결시킨 사례는 흔히 있다.
한·미원자력협정 타결이후 미국과학자협회(FAS)는 워싱턴에서 ‘한국이 어떻게 핵무기를 획득하고 배치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비공개로 회람했다. 미국과학자협회는 이 보고서에서 현재 한국정부는 핵무장에 나서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동북아 정세 변화 속에서 중대한 위협에 직면할 경우 핵무장의 길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현 상황을 추정컨대, 핵무장을 마음먹으면 5년 내에 수십개의 핵폭탄 제조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미원자력협정,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핵발전소 기술이 핵무기 기술에서 전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핵기술의 평화적·상업적 이용과 군사적 이용의 구분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위험한 기술을 수출이나 지역발전의 미래처럼 포장한다고 해서 거기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 이런 면에서 이번에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내용은 정확히 국민에게 공개되고 국회 비준 절차를 통해 정확히 확인돼야 한다. 또한 우라늄 농축과 핵재처리 기술이 과연 우리의 미래에 필요한 기술인지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핵을 핵으로 막는다는 허황된 꿈이 냉전시대 핵무기 경쟁을 낳았고, 결국 인류를 파멸에 빠뜨릴 뻔 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무책임한 핵무기 경쟁이 아니라, 동북아 비핵화 선언 등 한반도 주변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헌석 편집위원(에너지정의행동 대표)
2015년 5월 (제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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