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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 씨 인터뷰 : 우리 동네에서 송전탑이 보이지 않는 땅은 한 뼘도 없어예

우리 동네에서 송전탑이 보이지 않는 땅은 한 뼘도 없어예

-인터뷰 : 김영자 (밀양 상동면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총무)-

인터뷰 진행: 박혜령 통신원(영덕핵발전소유치백지화투쟁위원회 집행위원장)

 


밀양을 향하는 희망버스가 도착하는 상동면 여수마을을 찾았다. 12시가 넘은 한 밤에 김영자 총무님을 만났다. 목이 쉬어 말을 잇기도 힘든 상태였다. 동네를 둘러싸고 지어질 송전탑 공사 현장을 수백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함께 오르며, 감기가 더해져 링거를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골에서는 젊은 나이인 57세의 여자 총무님. 시골에선 흔치 않은 여자 총무를 맡으며, 송전탑 반대활동에 온종일 시간을 내놓고 있는 그 분의 속내를 들으며 밤을 지세웠다.

 

나는 한전이 돈으로 주민들을 회유하는 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어예!

여수동은 2005125765kV 송전탑을 처음으로 반대한 동네입니더. 여수동은 넓지 않은 들을 끼고 있어예. 산과 산 사이에 동네가 있는데, 주위 산에 송전탑이 5기가 세워져예. 어디서도 철탑을 보며 살 생각을 하면 잠도 안오는기라

2005년 반대 이후 공사 강행과 중지가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 2005년 당시 반대는 상동면 소재지 한가운데 세워질 철탑 때문이었다. 121번 송전탑 주변은 학교, , 은행 등이 위치한 면소재지 중심이다. 공사가 진행되려다가 공사용 대형 차량의 진입이 여의치 않고 반대가 극심해 지자, 주민들의 접근이 어려운 산꼭대기 공사가 먼저 진행되고 있다.

처음에는 반대 대책위가 생기고 대책위원장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예. 현재는 대책위원장 없이 5명의 위원으로 구성해 반대활동을 하고 있어예. 그 이유는 대책위원장이 세워질 때마다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전과 합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예.”

상동도 위원장의 교체가 모두 5차례 있었다. 마지막 5번째 위원장이 활동할 당시에도 합의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회의에서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합의를 막기 위해 총무를 선출하자고 제안했고, 본인이 그 역할을 하겠노라 자청했다. 한 번은 주민들 몰래 대책위원장들이 시의회에서 한전과 합의서를 놓고 서명 직전인 현장을 목격하고 막은 일도 있었다.

한전은 반복해서 반대하는 주민들의 대표를 숱한 회유책으로 주민 동의 없이 합의를 종용해왔다고 한다.

 

돈 더 받으려고 반대한다는 얘기가 제일 속상해예!

지금도 밀양의 일부 사람들은 돈 더 받으려고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하곤 해예. 속마음을 몰라주는 사람들이 야속하고 서운해예.”

보라마을의 고 이치우 어르신이 한전의 공사강행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분신자결하신 후, 한전은 여수마을에 수십억의 합의안을 가지고 들어왔다. 주민들은 이전과 비교해 두 배가 넘는 합의금에 술렁였다. 울분을 터뜨리며 합의를 받아들이려는 이웃들을 향해 말했다. “시장에 가니 시장통 사람들이 돈 더 받으려고 반대한다고 수군거리더라. 이제 보니 맞는 말이네. 우리가 그 돈 더 받을라꼬, 지금까지 이 고생하며 반대했나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 날 한전과의 합의는 무산됐다. 그 후 2011111일 여수동에도 공사가 진행되었다. 마을 옆으로 산 능선을 따라 5개의 철탑이 세워질 것이다.

얼마 전 기자란 사람이 와서 땅이, 농사가 나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땅은 내게 생명이고 목숨이다가라고 대답했다. “송전탑을 반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농사를 짓는 마음이고 땅을 지키는 마음이에예. 지금 우리는 우리 목숨을 지키려는 거라예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 분의 눈가는 계속 젖어 있었다.

 

아름다운 이 곳 여수마을은 제 인생 전부라예!

시집온 지 34. 고정리 골짝에서 차로 5분 거리인 상동 여수마을로 시집왔다. 현재 92세의 시어머니가 옆집에 살고 계신다. 34년 전 10남매 중 8형제의 5번째 며느리로 시집와서 손톱이 으스러져라 땅을 파 시동생들과 시부모님 그리고 아이들을 건사했다. 당시 김영자 총무님의 가족이 가진 땅은 논 두마지기(400)와 밭 300평이 전부였다.

“12년을 논을 빌려 하우스 농사를 지었어예. 많은 식구들이 손바닥만한 땅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었지예. 그리고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면 땅을 샀어예. 돈이 있다고 하면 시댁 식구들이 빌려 달라고 할까봐 빚을 내, 보태서라도 샀어예. 그렇게 장만한 논 1000여 평에 하우스 4동을 지어서 15년을 넘게 하우스 고추 농사를 이어오고 있어예. 2003년 전국을 휩쓴 태풍 매미에 하우스가 모두 부서졌어예. 내 손으로 직접 더 튼튼한 골조를 박아 하우스를 복구했어예. 어느 곳 하나 내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예. 보기만 해도 부자같십니더.”

평생을 일복도 한 벌 사 입지 않으며 절약했고, 작은 논과 밭을 장만하며 집도 지었다. 매일 새벽 4시면 집을 나서 하우스로 향한다. 어느 날 문득 새벽하늘을 보니, 새삼 동네가 이렇게 예뻤나싶은 생각에 마음이 훤히 비워지더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녀는 지금도 하우스 4동을 혼자 관리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새벽에 노래를 부르며 일을 하는데, 나 자신이 이런 인생, 이런 순간이 무척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예. 전 여수마을이 참 좋아예. 겨울이 되면 오리들이 찾는 강도 예쁘고예. 빙 둘러싼 산들도 그리 예쁠 수가 없어예. 타지 사람들도 밀양이 참 좋다안캅니꺼.”

 

촌에 사는 노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힘들게 싸워야 하는 이유를 살펴봐주이소!

송전탑이 보이는 곳의 땅은 농협에서 담보대출을 해주지 않고 팔리지도 않아예. 우리 동네에서 송전탑이 보이지 않는 땅은 한 뼘도 없어예.”

함께 송전탑 반대를 하고 있는 칠십이 넘은 할매들은 더 숱한 고생을 견디며, 평생 땅을 일군 사람들이다. 허리가 휘고, 손은 거칠고, 다리도 절룩거린다. 좀 긴 거리를 걸어가려면 지팡이에 의지해야 갈 수 있다. 그런 어른들이 날마다 송전탑 짓는 걸 반대하다며 새벽길에 나와 불을 지피며 추위를 견디고 서로에게 힘을 내라 말을 건넨다. 이런 분들이 평생 고생하며 일군 소중한 땅을, 휴지조각으로 만들 송전탑을 막겠다는 기막힌 심정은 생사를 걸 만큼 절박하고 절절하다.

송전탑을 막자고 산을 오를 때면 매번 이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불의는 진실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반드시 이긴다. 매번 이렇게 마음을 먹어도 힘든 순간은 늘 이들을 흔들어 왔다.

가장 힘들 때는 처음에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동네 사람들이 몰라줄 때였어예. 어느 날 주민 한 분이 농협에 가니 담보대출이 되지 않자, 그 때부터 주민들이 조금씩 송전탑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한 재산상, 건강상 피해를 주는지 알게 되었지예, 그 때부터 하나로 뜻을 뭉치기 시작했어예.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참 별나다고 말을 해예.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한 번만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어예. 그러면 그런 말 못할 거라고 생각해예. 평생 일군 땅과 집과 재산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데 억장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교.”

이보다 더 힘든 것은 밀양시청과 한전이 주민들에게 계속해서 내놓는 합의안이다. 이제는 동네 보상이 아니라 개별보상을 하겠다고 회유한다. 그런데 송전탑에서 멀리 떨어져 피해가 아주 적은 주민들 일부가 합의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약한 마음을 이용해 합의를 하고 주민들간에 원수가 되게 하는 한전의 이런 처사가 가장 힘들다고 토로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희는 전기 안쓰나며 다 같이 살자고 양보를 하라고 해예. 나는 이런 분들께 촌에 사는 노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힘들게 싸우는 이유를 살펴달라고 말하고 싶어예. 우리만 피해를 감수하라는 것은 불공평하고 가혹하다고 생각해예. 시골에 사는 노인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어예. 우리도 국민이잖십니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는 못할망정, 국가가 강탈해서는 안된다이들의 절규를 들어라!

지금 한전이 하는 송전탑 공사는 자신들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힘없는 국민도, 국민이다고 소리치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는 못할망정, 국가가 강탈해서는 안된다고 절규하고 있다.

이들 모두의 바람은 더는 짓밟히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되찾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힘내라며 찾아오는 분들에게서 많은 힘과 용기를 얻는다고, 오늘이 더 없이 행복하다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자연에 순종하고 주어진 삶을 묵묵히 감내한 이들의 삶이 국책사업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다수의 편리를 위해서라는 궁색한 이유로 더는 유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발행일 : 2013.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