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산업계도 언젠가 핵발전소는 없어질 것이라 이야기한다
“1980년대 핵발전 비중이 50%가 넘을 때도 있었는데, 이제 30%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핵발전이 늘고 있다고 이야기를 하시나요?”
얼마 전 한 토론회에서 만난 한수원 관계자의 말이다. 맞는 말이다. 최근 30여년 동안의 경향을 보면 전체 전력에서 핵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고 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마치 우리나라는 탈핵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핵발전소 개수와 설비용량은 당시보다 2~3배 이상 늘었다.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절대량은 계속 늘어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핵산업계와 만나면 종종 듣는다. 심지어 한수원 관계자가 ‘핵발전은 언젠가 사라질 기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그런가’하고 되물으면, ‘핵융합 등 새 기술도 나올 것이고, 우라늄도 한계가 있어서 무한히 핵발전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 ‘언제쯤 핵발전이 사라질 것인가’라고 물으면, ‘한 100년쯤 뒤엔 다른 기술이 나올 것이다’와 같은 답을 하곤 한다.
탈핵(脫核), 핵발전소에서 벗어난다는 말이 매우 과격하고 소수 환경론자들의 주장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시간 범위를 길게 잡고 용어 정의를 바꾸면 핵산업계도 동의할 수 있는 탈핵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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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5일(목),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2층 강당에서, ‘탈핵에너지전환 시민사회로드맵’착수보고회가 있었다. 당일, 강우일 주교(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가 기조강연을 하는 모습.
탈핵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건 바꿔 말하면 탈핵의 의미 규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월성1~4호기를 합한 발전설비 용량은 2,779MW(메가와트)이다. 반면 영덕에 지으려고 하는 신규핵발전소 천지1~2호기의 설비용량을 합하면 이보다 큰 3,000MW이다. 즉 월성1~4호기 4기를 폐쇄하고, 천지1~2호기를 추가 건설하면 핵발전소 개수는 줄어들지만, 설비용량은 늘어나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이 그간 탈핵진영이 주장한 ‘탈핵’이 아닐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앞서 한수원 관계자와 같은 지적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핵발전소에서 벗어나는 일, 탈핵은 이외에도 많은 합의와 논의가 필요하다. 탈핵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어떤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하는지, 국민투표 같은 국민적 합의를 모으는 과정은 추가로 필요하지 않을지, 탈핵 결정 이후 어떤 핵발전소부터 폐쇄를 해야 할지, 전력 충당을 위한 대안과 비용 마련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등등 핵발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큰 산’을 수 없이 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간 탈핵진영은 계속 밀려드는 현안 속에서 ‘어떤 산’을 넘어야 목표지점에 도착할 수 있는지를 생각할 여유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마다 생각하고 있는 목표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표될, ‘탈핵에너지전환 시민사회 로드맵’
그 사이 정치권의 움직임은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각 정당은 ‘20××년 탈핵’ 같은 공약을 발표했다. 정당마다 차이는 있지만 2030년에서 2060년 탈핵을 이루겠다는 정책의지를 밝힌 것이다. 잠시 탄핵국면에 묻히긴 했지만, 주요 야권 대선주자는 물론이고,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 역시 신고리5·6호기 건설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탈핵에너지전환 시민사회 로드맵’은 이런 상황에서 탈핵진영의 의견과 입장을 가다듬는 과정이다. 그간 기술적·경제적 검토를 위해 소수의 전문가들이 전력 구성 비율을 다루는 시나리오 작업은 다양하게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탈핵 진영의 의견을 모아 탈핵운동의 지향점을 찾고, 법-제도적 요구사항을 정리하는 과정은 아직 초보 단계이다.
서로의 경험과 요구가 다양한 탈핵진영의 의견을 모으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눈앞에 현안을 갖고 싸우는 지역과 현안문제에서 벗어난 서울-수도권 같은 곳의 요구가 같을 수는 없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2017년 3월 초안 발표, 대통령 선거 일정에 맞춰 최종 로드맵을 만드려는 현 계획은 매우 빠듯한 일정이다.
애초 6개월 이상으로 잡았던 로드맵 작성시간이, 선거 일정 변경에 따라 시기적인 부담감 역시 상당히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로드맵 작성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과거 선언 수준에 머물렀던 ‘탈핵’을 구체적인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으로, 그리고 결국은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별 단체, 개별 정당의 정책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공통안을 만드는 것 또한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탈핵진영이 반드시 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러한 과정이 부족하나마 ‘핵발전소 없는 한국’을 만드는데 또 하나의 기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헌석 편집위원(에너지정의행동 대표)
탈핵신문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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