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에 만난 사람 _ ‘탈핵을 염원하는’ 오하라 츠나키 씨
“후쿠시마 사고, 너무나 가슴 아프다”
오하라 츠나키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현재 22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탈핵신문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일본의 핵발전 관련 내용을 꾸준히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그는 탈핵 활동을 안 하면 마음이 괴롭고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 속에서 활동하는 성향이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탈핵 활동을 하는지 들어본다.
△ 오하라 츠나키 씨
-탈핵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전에는 핵발전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 뿐, 핵발전의 구조나 원리 또는 왜 위험한지 자세히 몰랐다. 후쿠시마 사고는 그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피해 규모가 막대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다는 것을 확신했다. 후쿠시마 사고 발생 당시 광주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매일 정부와 시민단체 등이 브리핑을 했는데, 시민단체인 원자력자료정보실(CNIC)의 브리핑 자료를 번역해서 한국의 탈핵 단체에 보내주거나 하면서 탈핵 활동을 시작했다.
2012년에 핵없는세상광주전남행동이 만들어져서 활동에 참여했다. 광주 사람들과 탈핵학교를 매년 열었고 탈핵 공부 모임도 만들어서 운영했다. 후쿠시마 사고 관련해 교안을 만들고 강연을 하기도 했다. 2013년에 교보재단에 공모해 800만 원을 지원받았는데, 그 예산으로 후쿠시마 청소년들을 광주에 불러서 한·일 청소년 에너지 캠프를 열었다. 후쿠시마 청소년들이 직접 겪은 핵사고의 경험을 토대로 한·일 청소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캠프를 진행할 수 있어서 참 뿌듯했다.
- 한국에는 언제 왔나
1995년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한국에 홈스테이를 왔다. 그때 한국은 나에게 엄청난 신선함을 주었다. 일주일 있었는데 사람들이 역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더라. 일본에서 TV로 접했던 한국의 이미지와 실제 보는 한국은 너무 달랐다. 그때가 광복 50주년이었는데 일본에서 한·일 역사를 자세히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조금이나마 그 역사를 알게 된 계기였다. 그때부터 혼자 한국어를 공부했고, 2000년에 편입한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다시 한국에 왔다. 전남대 사회학과에서 1년 동안 공부했고, 그때 사귄 남자친구와 2003년에 결혼해 광주에 살게 되었다.
- 한국에서 직장생활도 했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조금 크자 2007년 광주환경운동연합에 공채로 들어갔다. 18개월 아기는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당시 육아가 너무 고독했고,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어 강사나 국제교류센터, 다문화센터 이런 곳에서 일하면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니까 접근하기 싫고,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싶었다.
일본에서 사회생활을 길게 하지 않았고, 시민운동이나 탈핵 운동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환경연합 상근자로 있으면서도 현안을 다루는 부서가 아니고 회원조직국에서 회원관리와 회계, 소식지 만들기, 환경교육 이런 일을 7년 동안 했다. 애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내 업무 영역이 달라서 힘들기도 했으나, 지나고 보니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선배들이 의욕 있다면 끝까지 해봐라, 일을 배워라, 이렇게 말해주어 고맙다.
- 탈핵신문 사무국에서 활동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2014년 환경연합을 그만두었고, 프리랜서로 탈핵 활동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15년에 탈핵신문 윤종호 전 편집국장이 나에게 탈핵신문 사무국 일을 제안했다. 윤 국장은 그 전에 탈핵신문 창간할 때부터 영광 집회나 광주에서 간간이 접할 기회가 있던 분이다. 탈핵신문 하면서 많이 배웠다. 글쓰기를 어려서부터 좋아하기는 했으나, 나는 글 잘 쓴다는 착각이 있었다. 그런데 탈핵신문에 기사 쓰면서 부족함이 드러나고 글 쓰는 걸 많이 배웠다.
그리고 일선에서 탈핵운동하는 분들과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다. 핵발전소 지역과 건설 예정 지역 등을 다니고, 인터뷰도 하고, 탈핵 운동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목소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시민사회 활동가라면 탈핵이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관심 있으니까 탈핵신문도 많이 배포했다.
- 일본과 한국의 탈핵 운동, 서로 배울 점이 있다면?
각 나라의 조건에 맞게 활동하는 거 같다. 한국에도 반핵전문가가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반면 한국은 일본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역동성이 항상 있다.
한국은 핵 관련해 물어볼 전문가 집단이 많지 않은데 일본은 반핵운동 역사가 길고 반핵전문가와 집단이 탄탄하다. 원래는 원전기술자였지만 핵발전 문제점을 알게 되면서 탈핵 쪽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원자력자료정보실(CNIC), 원자력시민위원회(씽크탱크), 플랜트 기술자의 모임과 같은 원자력 문제 연구그룹들이 있다. 이들 전문가 집단은 꾸준히 활동한다.
각 지역에는 핵발전소를 재가동 못 하게 하는 모임 등 현안에 따른 모임이 있다. 또 집단이 아닌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도 많은 편이다. 그리고 변호사 등이 법률지원을 많이 한다. 일본은 운동이 어려우니까 법정투쟁을 많이 하는데 이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일을 한 가지 추진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반면 한국은 빠르다. 예를 들어 안 좋은 법 통과되면 바로 그날 성명서가 나오고, 다음날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에 나온다. 일본은 그게 잘 안 된다. 일본은 국토가 길고 교통비가 비싸서 한곳에 모이기 어려운 조건도 있다. 반면 토론회 등은 잘 준비하고 운영도 잘 한다.
- 나에게 탈핵신문은?
애정이 많다. 박스에 지금까지 발행한 신문 1호부터 96호까지 다 모으고 있다.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지속되기를 원한다. 아무래도 일본에서 큰 사고가 났고, 전 세계 사람에게 폐를 끼친 건 사실이다. 한국에도 핵발전소가 많으니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 하고, 그런 역할을 나름대로 하려고 했다. 내 역할이 약하더라도 탈핵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2017년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결국 지고, 그 이후 2018년부터 나도 지쳐서 활동을 거의 안 했다. 탈핵신문 잠시 휴간했던 시기와 겹친다. 이후 탈핵신문 재발행과 함께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매달 일본 소식을 쓰고 있다.
2019년부터 3년 동안 다른 일을 했는데 안 되겠더라. 활동 안 해도 부담스럽더라(웃음).
올해는 무언가 역할을 찾아서 자청하고 하고 싶다. 40대 중반인데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멋도 모르고 한국에 와서 편하게 살아도 되는데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환경연합 들어가서 일한 것도 탈핵신문에서 일한 것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책 <방사선 피폭의 역사>도 공동번역했더라
방사선 피폭의 위험성은 핵폭탄 개발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왜곡되고 은폐되어왔다. 일본에서 출간한 이 책은 ‘미국 핵폭탄 개발부터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까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그 책을 무명인출판사에서 펴내기로 했고 세 명이 공동으로 번역했다. 책이 어려워 번역하고 펴내는데 5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많은 사람에게 피폭의 아픔을 강요해온 역사의 기록이다. 이 책이 한국의 탈핵 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노재팬’ 등 한국의 반일감정으로 힘든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반일감정이 없을 수가 없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했고 못된 일을 많이 했는데도 제대로 된 반성이 안 보이니 당연하다. 한·일 관계가 안 좋아서 힘든 순간이 최근 몇 년 들어 많이 늘었다. 양국이 슬기롭게 잘 해결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또 후쿠시마에도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들이 후쿠시마에서 살 수밖에 없는 고통과 환경을 생각한다면 그곳을 ‘죽음의 땅’이 아닌,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보고 인간의 고통을 함께 고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핵은 정말 인간적이지 않다. 후쿠시마 사고가 정말 가슴 아팠다.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게. 그렇게 안전하다고 했는데 날벼락으로 큰 사고를 겪고, 가족도 잃고. 엄청난 규모로 사고가 났음에도 정부는 계속 축소하고.
일본은 원폭 피해 경험이 있어 평화교육을 많이 한다. 그런데 핵폭탄과 핵발전을 분리해서 가르치고 침략이나 식민지 역사는 안 가르친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을 향한 복잡한 마음이 항상 있다. 애증이다.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항상 있고, 한·일 관계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그런 마음이 한국에 오래 살면서 강해졌다.
용석록 편집위원
탈핵신문 2022년 3월(97호)
탈핵신문은 독자의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운영합니다.
탈핵신문 구독과 후원 신청 : https://nonukesnews.kr/1409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난은 약한 쪽부터 무너뜨린다 (0) | 2021.09.15 |
---|---|
[봉화군 송전탑 반대 투쟁] 처음 경험하는 싸움, 그 길 위에서 (0) | 2021.08.20 |
신고리 5·6호기 부지선정·내진설계 등 위법성 명확하다 (0) | 2021.05.18 |
[사람] 길 위의 목사, 천막농성·길거리 투쟁 10년 (0) | 2021.04.16 |
[사람] 권력에 구속받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자유인 (0) | 2021.03.16 |